[이산가족 상봉] 대부분 형제·자매 상봉… ‘어렴풋한 기억’ 서로 확인

입력 2015-10-20 22:57
우리 측 이산가족을 태운 버스들이 제20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 첫날인 20일 오전 상봉 장소인 금강산으로 가기 위해 동해선 육로를 달리고 있다. 연합뉴스

20일 시작한 제20차 이산가족 상봉은 분단 70년의 세월을 실감케 한다. 헤어지기 이전 서로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산가족 1세대 대신 비교적 먼 친척이 상봉에 나서는 경우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생면부지’인 사람들이 동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번 상봉에서 직계 부모와 자녀가 만나는 경우는 다섯 가족에 지나지 않는다. 부부 상봉이 이뤄진 건 두 가족뿐이었다. 형제·자매간 상봉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3∼4촌간 상봉도 상당히 가까운 편에 속한다. 조카사위와 조카며느리, 이종사촌, 시동생 등이 눈에 띄며 5∼6촌이 포함된 가족도 있었다. 일부 가족은 건강 악화로 꿈에 그리던 상봉을 포기하기도 했다.

이천우(78)씨는 이번에 북측에 있는 누나 이문우(82)씨를 만난다. 동행자로는 이씨의 여동생 이순이(77)씨 외에 올케와 사촌, 조카가 동행한다. 이들 가족의 고향은 경기도 양평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이곳에서 살아왔다. 이문우씨는 1943년 궁핍한 생활에 함흥 친척집에 의탁했고, 이후 분단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영영 소식이 끊겼다.

이순이씨는 이문우씨의 직계 동생이지만 헤어질 당시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씨는 당시 다섯 살에 불과했다. 이씨는 “사실 (언니가) 기억나지 않는다. 언니가 함흥에 가고 나서 편지와 사진을 보내줬지만 그 사진을 보고 얼굴을 아는 정도”라고 했다.

이순이씨보다 한 살 많은 오빠 이천우씨는 북한의 누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그는 “누나가 바느질을 잘해 상으로 받은 고무신을 꼭 끌어안고 자던 모습, 나를 등에 업고 노래를 불러주던 정도가 기억난다”고 했다. 사촌동생인 이흥우(64)씨 또한 북측 가족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으며, 조카인 정옥근(56·여)씨는 이문우씨가 북에 간 뒤 10여년 뒤에 태어났다. 정씨는 “이모님이 북에 계시다는 걸 어렸을 때부터 간간이 들었을 뿐”이라며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이어서 직접 만나면 꽤 어색할 것 같다”고 했다.

이요영(83)씨는 북에 있는 고모 이순기(84)씨를 만난다. 두 사람은 7촌 관계로, 헤어질 당시에도 전혀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이씨는 “나는 고향이 충남인데 고모는 인천에 살아서 왕래가 전혀 없었다”면서 “6·25전쟁이 터지고 고모가 북으로 가셨는데 왜 그러셨는지는 모른다. 전쟁이 끝난 뒤 집안 어른으로부터 그 사실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몰랐다”며 “내 혈육이니 만나보려 한다. 죽기 전에 어떻게 생기셨는지 확인해보고 싶다”고 했다.

이번 상봉에서 남측 방문단 대다수는 70∼80대다. 분단이 70년 넘게 이어진 점을 미뤄볼 때 이산가족 1세대라고 해도 헤어졌을 당시에는 10세 안팎에 불과하다. 어린 시절 기억 외에는 서로에 대한 기억이 없는 셈이다. 북측 상봉단은 97명 중 70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80대로 이뤄져 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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