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옥 ‘피부 미인’ 자작나무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원대리 산 75-22번지 원대봉(684m) 자락에 들어서 있다. 깊은 산중인데도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하얀 나무껍질의 자작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풍광은 매우 이국적이어서 먼발치에서도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경사가 완만한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임도를 따라가면 1시간여 만에 닿는다. 도중에 삭막한 콘크리트 포장구간도 있지만, 추색(秋色) 완연한 경치에 취해 걷다보면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다. 어디선가 숲의 정령이 불쑥 나타날 것만 같다.
초소에서 3.5㎞쯤 떨어진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은 산림청 인제국유림관리소가 1974∼95년 조성했다. 총 138ha(약 41만 평)의 산비탈에 자작나무 69만 그루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그중 25ha(약 7만5000평)가량이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란 이름을 달고 각지에서 찾아드는 탐방객을 맞고 있다.
하얀 나무껍질이 특징인 자작나무숲은 ‘숲의 귀족’으로 불린다. 기름기 있는 분가루 같은 것이 껍질 표면에 묻어 있어 하얀색을 띤다. 갈색의 안쪽 껍질은 종이처럼 얇게 벗겨진다. 종이가 없거나 귀하던 시절에는 종이 대용으로 사용됐다. 자작나무는 불에 잘 타는 나무이기도 하다. 불을 붙이면 금세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탄다고 해서 이름을 얻었다. 한방에서 백화피(白樺皮)라 부르는 껍질은 이뇨, 진통, 해열 등의 효과가 있어 약재로도 유용하다. 옛날 신혼 첫날밤 부부가 백년해로를 다짐하면서 태웠던 화촉도 이 나무의 껍질이다.
산림관리초소에서 입산등록을 하고 본격 트레킹을 시작한다. 자작나무 숲길을 자분자분 걸으면 들뜬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는다. 두 팔을 활짝 벌려 심호흡도 하고 자작나무 잎을 스치는 바람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여유가 생긴다. 자작나무숲 안에서 산책하면서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고, 만질 수 있는 오감이 통하는 마법 같은 숲이다.
가까이서 보는 자작나무는 묘한 매력을 풍긴다. 귀인의 살결 같은 수피(樹皮)는 하얗다 못해 은빛을 발할 만큼 황홀하다. 새하얀 껍질에 사랑을 고백하는 글을 써 편지를 보내면 사랑이 금방이라도 이뤄질 듯하다.
자작나무숲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50여분이면 충분하다. 통나무로 만든 정글집, 나무의자, 그네 등이 오솔길마다 있어 급할 것 없이 쉬어가라 손짓한다.
화려한 단풍을 자랑하는 방태산 ‘이단폭포’
원대리 자작나무숲 입구에서 방태산 자연휴양림까지 가는 길은 우리나라에서 깨끗한 하천으로 유명한 내린천 물길과 ‘최후의 원시림’ 진동계곡에서 발원한 방태천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 ‘소 발자국에 괸 물도 먹는다’는 가을이라 내린천과 방태천의 물빛은 한층 맑고 푸르다.
방태산(1444m)은 구룡덕봉(1388m)과 함께 인제 기린면과 상남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봉이다. 산봉우리가 높고 숲이 울창한 만큼 계류도 풍부하다. 적가리골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이단폭포는 제1야영장과 제2야영장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다. 높이가 각각 10m, 3m쯤 되는 폭포 두 개에서 비단결 같은 물줄기가 쉼 없이 쏟아져 내린다. 전국이 가뭄으로 아우성인데 이단폭포의 물떨어지는 소리는 우레 같다. 폭포 주변에는 단풍나무를 비롯한 각종 활엽수가 가을햇살을 받아 화려한 가을날 풍광을 그려내고 있다.
제2야영장 위쪽에는 약 2.5㎞ 길의 숲 체험 탐방코스가 개설돼 있다. 활엽수림, 조릿대숲, 낙엽송숲, 소나무숲 등 다양한 형태의 인공림과 천연림을 지나는 탐방코스다. 길이 비교적 평탄하고 뚜렷해 남녀노소 모두 둘러보기 좋다.
10월에만 열리는 ‘홍천 은행나무숲’
홍천군 내면에는 삼둔으로 통칭되는 계곡이 있다. 살둔과 달둔, 월둔이다. 접근하기는 어렵지만 풍광은 수려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내면 광원리 686-4번지 일원에 개인 소유의 은행나무숲이 있다. 조성 과정에 로맨틱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도시에서 사업을 하던 은행나무숲 주인은 아내가 만성 소화불량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삼봉약수가 효험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오대산 자락에 정착하게 됐다. 남편은 아내의 쾌유를 바라며 잠실운동장 크기의 넓은 땅에 은행나무 묘목을 하나둘 심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묘목은 아름드리나무가 됐고, 아내는 건강을 되찾았다. 현재 2000여 그루의 은행나무숲은 가을만 되면 황금빛 물결을 허공에 퍼뜨리는 힐링의 공간이 됐다.
1985년부터 25년 동안 단 한 번도 개방하지 않다가 2010년 입소문이 나면서 관광객들을 위해 1년 중 10월에만 무료개방하고 있다. 주민들만 즐기던 비밀의 숲은 만인이 즐기는 ‘가을 정원’으로 거듭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란 물결이 하늘을 수놓는다. 이미 절정을 지났지만 이번 주말에도 늦된 나무에는 잎이 남아 있을 듯하다. 더욱이 은행나무 숲은 잎이 떨어져도 장관이다. 노란 카펫이 깔린 숲길을 걷노라면 마음마저 노랗게 물든다.
인제·홍천=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