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폭력조직과 연루된 동남아시아 원정도박 수사가 확대되고 있다. VIP 카지노룸을 제공받아 도박을 즐긴 이들로 자수성가형 기업인부터 유명 프로야구 선수까지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의 도박빚이 국내 폭력조직의 자금원으로 쓰인 사실이 드러나며 원정도박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상황이다.
◇크게 놀러 가는 동남아=동남아시아 유명 관광지마다 있다는 ‘정킷(junket·원정도박 알선)방’에 대한 검찰 수사가 강화된 건 지난 4월부터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부장검사 심재철)가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사망)씨의 양아들로 행세하던 김모(42·구속기소)씨의 기업자금 횡령 사건을 조사한 것이 계기가 됐다. 검찰은 김씨 공범의 휴대전화에서 도박빚 독촉 메시지를 찾아냈다. 마카오 정킷방 업자들과의 통화내용이 담긴 녹취파일, 도박장 매출 장부도 발견됐다.
검찰은 이때 마카오 정킷방의 일인자라는 광주송정리파 출신 이모(40·구속기소)씨의 범행을 포착했다. 검찰 수사가 조여 오면서 정킷방 4곳의 손님이 모두 끊긴 이씨는 지난달 자포자기 상태로 인천국제공항에 입국, 체포됐다. 검찰은 이씨를 상대로 정킷방 운영자들이 기업인들에게 도박자금을 빌려주고 ‘롤링수익’과 ‘루징수익’을 얻는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네이처리퍼블릭 정운호(50·구속) 대표 등 이름난 기업인들이 포함된 고객 명단도 확보했다.
정킷방 운영자들은 기업인들이 돈을 잃을 때마다 홍콩달러·페소 등을 빌려주고, 국내에서 갖은 방법으로 악성 추심을 하고 있었다. 기업윤리에 반하는 원정도박 자체를 약점으로 잡았다. 필리핀 카지노에서 바카라로 50억여원의 빚을 진 코스닥 상장사 I사의 최대주주 오모(54)씨가 대표적 사례다. 정킷방 업자 이모(30)씨는 오씨에게 “돈을 갚지 않으면 언론에 당신의 원정도박 사실을 알리고 회사로 쳐들어가겠다”고 협박했다.
◇어디부터 범죄인가=해외 원정도박과 일회성 오락을 구분하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1985년 대법원의 판례도 “도박의 시간과 장소, 도박자의 사회적 지위 및 재산 정도, 그밖에 도박에 이르게 된 경위 등 모든 사정을 참작해 판단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대검 강력부 관계자도 19일 “도박에 쓰인 돈과 도박을 한 사람의 재산, 얼마나 상습적으로 했는지 등을 살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기업인들의 해외 원정도박이 국내 조폭 조직원의 자금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기업인들의 원정도박은 단위가 크고, 회삿돈이 도박자금으로 쓰인다”며 “조폭들은 이러한 돈을 신종 자금줄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정킷방 고객이던 울산의 해운업체 K사 대표 문모(56)씨의 경우 잃은 돈의 10%가량이 회삿돈으로 충당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이 눈여겨보는 동남아 지역 정킷방 중에는 조폭과 연관되지 않은 곳이 없다. 광주송정리파 이씨에게만 기대서 원정도박 수사망을 넓히는 게 아니다. 검찰은 베트남에서도 도박장을 운영하던 신모(50)씨를 최근 적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수사는 마카오뿐만 아니라 필리핀·캄보디아·베트남 지역의 정킷방까지 뻗어가고 있다. 현재까지의 수사 결과 해외 원정도박에 연루돼 입건된 이들은 기업인 3명을 포함해 총 26명이다. 이 가운데 12명이 구속됐고, 2명은 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태다. 검찰 수사 대상에는 20억원 미만의 도박을 한 기업인 5∼6명이 추가로 올라있다.
정현수 이경원 기자 jukebox@kmib.co.kr
기업인 도박 빚, 조폭 ‘신종 자금줄’
입력 2015-10-19 21:43 수정 2015-10-20 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