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 남북 이산상봉] “인민군 꾐에 따라간 동생 죽은 줄 알았는데…”

입력 2015-10-19 23:01
우리 측 이산상봉단에 포함된 이차숙 할머니가 19일 강원도 속초 한화리조트에서 상봉 예정인 오빠 이병룡 할아버지의 예전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이 할머니의 오빠는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됐다. 연합뉴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은 공부 욕심이 많았다. 노는 법도 없이 매일 집에서 책을 들여다봤다. “중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없는 살림에 아버지는 단칼에 거절했다. 며칠을 밤낮으로 울며 떼를 썼다.

동생이 17세 때인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전북까지 남하했던 인민군은 퇴각하며 동생에게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했고, 동생은 그 길로 인민군을 따라나섰다. 집에는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슬픔, 장래 포부 등을 써둔 일기장 두 권을 남겼다.

“똑똑한 애니까 살아있으면 연락이 올 거야.” 가족들은 매해 동생을 기다렸지만 더 이상 소식은 없었다. 아버지는 “나 때문에 애가 죽었다”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우는 날이 많았다. 그 동생 임옥례(82)씨가 제20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남측의 언니 임옥남(83)씨를 만난다. 죽은 줄 알고 포기했던 임씨 가족을 북한에 있던 동생이 먼저 찾았다. 임씨는 “연락을 받고부터 잠을 못 잔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며 “그동안 못 다한 정을 나누겠다. 남은 생,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라고 꼭 전해주겠다”고 말했다.

20일부터 금강산에서 시작되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참가하는 남측 방문단이 19일 강원도 속초 한화리조트에 모였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가족들은 오후 2시가 집결시간임에도 아침 일찍부터 모여들기 시작했다. 포성과 탄흔, 이별의 상처로 채워진 지난 세월은 이들의 얼굴에 주름살로 가득 새겨졌다.

6·25전쟁 당시 김호기(76)씨가 살던 경북 영덕에는 인민군들이 동네 큰 고택에 진지를 쳤다.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지긋지긋했던 인민군도 낙동강전선에서부터 줄줄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김씨 동네에 머물던 인민군은 “여기 남아 있다가 순경(경찰)들 오면 다 죽는다”며 주민들을 끌고 갔다. 이때 김씨의 누나 김기순(82)씨도 함께 붙들렸다. 그게 누나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김씨는 “여자 몸으로 영덕에서 북한까지 갔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끌려가다 죽은 걸로 알았다”며 “할아버지, 아버지 돌아가실 때마다 집안 어른들 모두 누님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피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당연히 찾을 생각도 못했는데 북측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고 한다. “여자 혼자 휴전선을 넘어 며칠을 북한까지 걸어갔다는데 가슴이 미어터진다. 얼마나 고생했을지….” 김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차숙(79)씨는 북한에 사는 오빠 이병룡(84)씨를 만난다. 19세였던 오빠는 경북 예천에서 인민군에 의해 북에 끌려갔다. 동네에 버스나 활동사진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손을 잡고 데려가 구경시켜줬던 오빠였다. 오빠가 끌려가고 한 달도 안돼 국군이 마을에 들어왔다. ‘오빠도 죽었을 테지’ 하고 산 지 벌써 65년이 흘렀다.

어머니는 생전에 “아들 한번 만나보고 죽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돌아가실 때도 오빠 사진을 가슴에 안았다. 이씨는 “오빠가 찾는다는 전화를 받고 많이 울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 정말…”하곤 울음을 삼켰다.

이순이(76)씨도 북한의 언니 이정우(82)씨를 만난다. 함흥 살던 친척이 양평의 이씨 집에 왔다가 “잘 먹이고 공부도 시키겠다”고 데려갔다. 하지만 2년 만에 전쟁이 났고 연락이 끊겼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언니를 데려오겠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씨는 “상봉 신청도 하고 개인적으로 수소문도 했지만 허사였다. 그런데 이번에 연락을 받고 보니 언니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고 말했다.

강준구 기자, 속초=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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