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욱조 (13) 중국 교회서 찬양집회 중 잠입한 공안에 적발

입력 2015-10-20 18:28
장욱조 목사가 1995년 중국 한 교회의 집회를 하고 있을 때 교회 관계자가 김석균 목사(맨 왼쪽 안경 쓴 사람)가 쓴 쪽지를 장 목사에게 건네고 있다. 내용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라는 것이었다.

선교사는 무당을 우리 공연에 초대했다. 그 무당은 우리가 노래를 부르는 중에 눈물을 흘렸다. 통곡의 눈물이 아니라 은혜의 눈물이었다. 무당도 하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이다. 선교지에서는 그런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

한번은 일본 선교에 힘쓰시는 예선교회 황바울 목사님의 초청으로 일본 도쿄에 간 적 있다. 신주쿠 술집에서 일하는 한국인 여종업원을 대상으로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찬양간증집회를 인도했다. 종업원들은 제법 인기가수였던 내 얼굴을 알아보고 매우 반가워했다. 모인 자매 중에는 옛날 내가 일하던 룸살롱에서 만난 이도 있었다. 국내 교도소 집회도 기억에 남는다. 전남 광주에 사시는 허부경 권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간증과 찬양 요청이었다.

나는 은혜 가운데 집회를 마치고 허 권사님과 특별면회실로 갔다. 사형수 4명을 만났다. 나는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했다. 그 중 정○○ 형제를 잊을 수 없다. 그는 나에게 간절히 기도를 부탁했다. 기도 제목은 ‘사형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무기수로 남아 교도소에서 전도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돌아와서도 기도했다. 3개월 뒤 그 형제에게서 편지가 왔다. 내용은 기도대로 무기형으로 감형 됐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너무나 놀랐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는 것이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권 국가에 대한 선교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94년엔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중국을 통한 북한 선교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로서 기독교 선교가 금지된 국가였다. 95년 김석균이 나에게 제안을 했다. “형님, 이번엔 중국 가서 찬양 집회 해보실래요?” 나는 같이 갔다. 중국 각처 한인 크리스천들이 A교회에 모였다. 참석자는 50∼60명이었다. 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무척 신기하고 기뻤다.

우리가 세미나를 인도하는 중에 중국 공안경찰이 교회에 잠입했던 모양이다. 공안 2명이 김석균에게 조사할 것이 있다며 면담을 요구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강단에서 찬양을 하고 있었다. “당신들 입국할 때는 관광하러 왔다더니 왜 교회에 와 있냐? 우리나라에선 기독교 선교가 금지돼 있는 것 모르냐. 선교를 하면 처벌을 받는다.” 공안은 김석균에게 겁을 줬다.

김석균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국 방송국의 아나운서이고 지금 무대에 있는 사람은 유명한 가수이다. 우리는 관광차 왔다 여기 들러 잠시 동포들에게 한국 노래를 들려주는 것뿐이다.” 김석균은 한발 더 나가 공안에게 겁을 줬다. “당신들 말이야. 우리가 순수하게 관광하고, 노래하는데 이렇게 괴롭히면 한국 가서 중국 공안이 무례하고 무법하다고 방송할 거다.”

눈을 부라리며 힘을 줘 말했다고 한다. 어디서 그런 배포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나중엔 김석균의 기세에 공안이 오히려 겁을 먹었다고 한다. 김석균은 나오자마자 다른 사람을 통해 내게 쪽지를 건넸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르시오.’ 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하고 그 쪽지를 받자마자 이 노래를 불렀다. 두 사람은 교회 맨 뒷좌석에 팔짱을 끼고 앉았다.

내가 한 때 날리던 트로트 가수가 아닌가? 나는 신나게 트로트를 불렀다. 둘은 내 노래가 다 끝나자 일어서더니 ‘앙코르’를 외쳤다. 진짜 대중공연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복음 가수가 된 뒤에도 내가 트로트 가수였다는 게 행운이라고 느낀 순간은 많았다. 한번은 한 대형교회 경로대학 어르신 초청 예배에 갔다. 긴 설교가 이어지자 꾸벅꾸벅 조는 어른들이 많이 보였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