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난민 긴급 구호시설’ 국내 언론 첫 르포] 死線 넘은 그들 “독일에 있어 행복”

입력 2015-10-19 23:14 수정 2015-10-20 09:32
독일 베를린 시내에 있는 돔 형태의 '긴급 난민 피난처'의 외관과 내부에 난민 어린이들이 붙여 놓은 그림들.
지난 16일(현지시간) 찾아간 독일 베를린 시내 레흐르터가에 위치한 ‘긴급 난민 피난처’는 입구에서부터 경비원이 출입객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입구는 이중으로 돼 있어 반드시 한 출입구를 통과한 뒤 문을 닫아야만 다음 출입구가 열리는 구조였다. 누군가 난민들에게 위해(危害)를 가할 수 있어 출입을 어렵게 해놓은 동시에 벌써부터 영하로 내려간 베를린의 찬 기운이 피난처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가로 90m, 세로 40m 정도의 거대한 천막 돔 형태의 긴급 피난처는 인조 잔디구장 위에 세워져 있었다. 난민들이 몰려오자 황급히 축구장 부지를 피난처로 개조한 것이다. 이곳은 독일에 도착한 뒤 아직 제대로 거주지를 지정받지 못한 난민들이 머무는 임시 피난처로 ‘피난처 중의 피난처’로 통한다. 구호단체인 ‘베를린 시티미션’이 베를린시 당국의 의뢰를 받아 운영하는 곳으로, 국민일보는 국내 최초로 독일 외무부의 허가를 얻어 피난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피난처는 통상 300명 정도가 머무는데, 이날 오전 140명이 새 거주지를 지정받아 나갔다. 때문에 여전히 ‘남게 된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어두운 표정이었다. 돔 밖에서는 10여명의 남성이 돌아가는 사정 얘기를 나누는 듯 빠른 아랍어로 긴장된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갔더니 7세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후다닥 뛰어갔다. 이후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가 휙 지나가며 여아를 쫓고 있었다.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비좁은 공간이지만 돔 안에는 실내 놀이터도 만들어져 있어 그곳에서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돔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난민들이 피난처에 들어오더라도 출입이 제한되지는 않았다. 이날도 남성 난민들은 대부분 베를린 시내로 ‘정보’를 얻으러 나가 주로 여성들이나 갓 도착한 난민들만 머물고 있었다. 히잡을 쓴 여성들은 침대를 정리하거나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돔 안에는 ‘2층침대’ 3개가 들어가는 6인실용 방 수십 개가 꾸려져 있고 식당도 있었다. 여성과 남성이 머무는 방이 구별돼 있고 오후 10시 이후에는 부부라도 서로의 방으로 출입하는 게 금지돼 있다. 난민들은 시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코소보 파키스탄 등지에서 온 이들이었다. 대부분이 10∼40대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왔다는 압둘 바시야(24)는 “3주 전에 도착했다”면서 “아직 안정된 거주지를 못 받았지만 독일에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와 동행한 자린드(19)는 “빨리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피난처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은 독일어 수업이다. 교실이 있어 난민들이 독일어를 배울 수 있고, 예외 없이 수업에 열정적이라고 한다. 현지 관계자는 “난민들도 독일어를 해야 취직이 잘 된다는 걸 알고 있다”면서 “언어 수업에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경쟁적으로 참석한다”고 말했다.

피난처 벽면 곳곳에는 언어 이외 독일 사회를 배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적힌 시간표도 붙어 있었다. 그 가운데 ‘시티워크(city walk)’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현지인 인솔로 베를린 시내에 나가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물건을 사는 방법 등을 배우는 일종의 ‘독일 오리엔테이션’이었다.

피난처는 독일 일반 시민이 운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날도 20∼3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와 음식을 하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이들 이외 주변의 동네 주민들도 수시로 빵과 케이크, 커피 등을 들고 와 난민들의 마음을 녹여주고 있었다.

난민들은 전쟁과 가난을 피해 이곳에 왔지만 그래도 고국에 대한 사랑은 여전하다고 했다. 이를 반영하듯 벽면 한쪽을 가득 메운 아이들의 그림 중에 국기를 그린 것이 유독 많았다. 특히 국기 옆에 하트(♡) 표시나 ‘사랑한다(Love)'는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유럽까지 오는 동안 수천㎞ 여정에서 겪었던 힘든 경험과 이제 독일에서 막 시작해야 할 이국에서의 살아남기 경쟁이 10년 뒤, 20년 뒤 그들의 고국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난민들의 거듭남’을 국제사회가 적극 돕고 나선다면 말이다.

베를린=손병호 기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