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임항] 내 안의 소비자와 노동자

입력 2015-10-19 19:00

우리 사회에서 감정노동자들이 겪는 고충이 새삼 부각되고 있다. 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국내 임금근로자 1700만명 중 740만명(43.5%)이 ‘고객 상대 업무를 하루 절반 이상 수행’하는 감정노동자로 추정됐다. 이들은 ‘손님은 왕’이라는 기업의 노동자 통제 논리에 치여 때로는 노예처럼 행동할 것을 강요받는다. 최근엔 인천의 대형 백화점에서 점원 2명이 무릎을 꿇고 고객에게 사과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언제부터인가 감정노동자들은 손님에게 90도 절을 하고, 무릎 꿇고 주문을 받는다. 고객의 부당한 요구에도 그저 묵묵히 참아야 하는 존재다. 손님들도 이젠 종업원의 저자세에 익숙해진 나머지 과잉서비스를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고객 대다수는 그들보다 별반 더 나을 것 없는 처지의 노동자이거나 같은 감정노동자다. 일터의 ‘을’이 쇼핑할 때에는 다른 ‘을’에게 ‘갑질’을 하는 블랙코미디가 자주 펼쳐진다.

우리 대부분은 소비자이자 노동자다. 그러나 노동자로서의 나는 소비자로서의 나에게 진다. 우리나라에 만연한 노동 비하와 허울뿐인 소비자주의 탓이다. 소비자 편익과 노동자 권익 간 갈등은 최근 대형마트의 영업시간 논쟁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 영세 시장과 대형마트 간 이해 대립과 소비자의 쇼핑 편의만 언급될 뿐 영업시간 연장에 따른 종업원들의 건강과 가정생활 피해는 고려되지 않는다.

선진국 대도시에서는 밤중에 쇼핑하기가 쉽지 않다. 대형마트와 도소매점 영업시간을 저녁 7∼8시로 제한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곳의 종업원이 우리 눈에 당당하게 비치는 것도 그들이 손님과 동등한 노동자로서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려면 조금 더 불편해져야 하고, 조금 더 비싼 서비스 요금을 감내해야 한다. 우리 안의 소비자와 노동자는 서로 균형을 이뤄야 한다. 감정노동의 고통은 노동을 존중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극복할 수 있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