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공시생·재수생 ‘아픈 청춘’의 애환 남기고… 노량진 육교, 35년 만에 ‘추억 속으로’

입력 2015-10-19 02:05
자동차들이 18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 육교가 철거된 자리에 생긴 횡단보도 위를 지나고 있다(왼쪽 사진). 1980년 9월 준공돼 35년간 노량진역과 건너편을 이어주던 육교는 전날 밤 10시30분부터 철거작업에 들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토요일인 17일 오후 10시30분쯤 비로소 한산해진 서울 동작구 ‘노량진 육교’ 밑 차로를 구청 직원들이 통제하기 시작했다. 30분쯤 뒤 노란색 220t 크레인이 나타나 육중한 몸을 멈춰 세우고 갈고리를 늘어뜨린 기둥(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 느린 속도에 숨이 막혔다.

크레인은 어떤 의식을 수행하는 집행자 같았다. 사방의 가로등 빛을 받아 노랗게 드러난 기둥은 밤하늘 높이 세워졌고 당장이라도 육교를 덮칠 것 같은 모습으로 가만히 신호를 기다렸다. 기둥은 높이가 최대 72m, 육교는 15m였다. 35년 만에 노량진 육교를 걷어내는 작업은 그렇게 진행됐다.

노량진 육교 상판 제거 작업은 18일 오전 4시까지 이어졌다. 길이 30m, 폭 4m 상판은 1980년 9월 육교 준공 이후 무수한 시민이 밟고 건넌 길이다. 특히 대학입시에서 고배를 마셨거나 각종 고시로 입신양명을 꿈꾸는 청춘들이 건너왔다가 외로운 시간을 마치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육교는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 앞에서 맞은편 동작경찰서 입구 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크레인이 육교 밑에 자리를 잡자 행인들은 발걸음을 멈췄다. 노량진역 맞은편 카페에선 창가에 앉은 사람들이 육교로 시선을 돌렸다. 노량진역 막차에서 내린 시민들은 익숙한 듯 육교 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다 멈춰 섰다. 더 이상 육교로 이어지는 계단은 없었다. 상판에 연결된 계단 출입구 4곳은 이미 지난 4일과 15일 차례로 뜯어냈다. 사람들은 저만치서 육교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귀가 중이던 유준희(28)씨도 자전거에서 내려 한참 동안 철거 작업을 지켜봤다. 그는 “없어진다, 없어진다 하더니 그게 오늘이었다”며 “동작구에 8년째 사는데 내일부턴 노량진 육교가 없는 풍경을 지나간다고 생각하니 어색하다”고 덧붙였다.

대학원생 박성진(31)씨는 육교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찾아왔다고 했다. 노량진 육교는 그가 10년 전 재수학원을 다니려고 건너던 다리였다. 그 시절 재수 동기생들이 함께 나와 있었다. 박씨는 “학원생들 사이에선 학원 반대편으로 넘어가면 재수에 실패해 삼수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삼수교’라고 불렀다. 그 뒤로 노량진에 올 때도 가는 방향을 한 번씩 되돌아보곤 했다”고 말했다.

주민 한모(49·여)씨는 “고등학생 때 육교가 생겨 이 위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육교 위에서는 정말 멀리까지 보였다. 한가운데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했다. 노량진수산시장에서 18년째 일하는 김모(53·여)씨는 “매일 출근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다”며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했다. 육교 위에선 인부들이 용접기로 불꽃을 튀기며 상판을 잘라냈다.

동작구는 이날 오전 상판을 받치던 2개 기둥을 마저 철거했다. 이제 육교는 없다. 대신 새로 생긴 횡단보도가 육교의 그림자처럼 6차선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글·사진=홍석호 기자 wi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