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이 북한에 대한 첫 공동성명을 채택하자 북한이 만 하루도 안 돼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했다. 4차 핵실험 등 벼랑 끝 전술을 동원할 것이란 우려가 컸던 것에 비하면 다소 뜻밖의 행보다. 고조되는 북핵·인권 상황에 대한 비판에 대화 가능성을 내비치며 탐색전에 나섰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와 당국 회담, 주요 다자 외교무대가 남은 연말 한반도 정세가 중요 변곡점을 맞고 있다.
북한은 한·미 정상회담 이후 20시간 만인 17일 오후 늦게 외무성 성명을 내고 한반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할 것을 미국에 촉구했다. 북한은 성명에서 “조·미(북·미) 사이에 신뢰를 조성해 당면한 전쟁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다면 핵 군비 경쟁도 종식시킬 수 있고 평화를 공고히 해나갈 수 있다”며 평화협정을 제안했다.
주목되는 표현은 ‘핵 군비 경쟁’이다. 그동안 북한의 공식 문서에 잘 등장하지 않았던 단어로, ‘핵 군축’은 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자는 18일 “북한이 공식 문서에서 핵 군비 감축 가능성을 내비친 것은 다소 변화된 태도”라고 설명했다.
북한이 평화협정을 제안한 것은 이달 초 제70차 유엔총회와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 이어 올 들어 3번째다. 이를 두고 고조되는 대북 압박에 맞서 대화 가능성을 흘리며 탐색전에 나선 것이란 해석이 우선 나온다. 지난달 장거리 미사일 발사 및 4차 핵실험 가능성을 흘리며 위협했지만 오히려 중·미, 한·미 정상회담에서 잇따라 고강도 비판이 나오면서 입지가 좁아졌다고 판단했을 개연성이 크다.
미국의 ‘비핵화’ 요구에 맞서 ‘평화협정’ 카드로 맞대응하려는 노림수라는 관측도 있다. 기존 정전협정은 다시 전쟁이 시작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만 평화협정은 전쟁을 중단하고 상대 체제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요청할 명분이 생겨 ‘핵 vs 미군철수’ 구도가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할 경우 이를 강하게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에 협정을 제안한 것은 북·미 양자대화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형식논리상 정전협정 대상이 미국이긴 하지만 실질적 교전국인 한국을 배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김정은 시대’를 선포한 상황에서 북한 인권에 대한 대대적인 압박에 위기감을 느꼈을 개연성도 크다. 한·미 정상이 북한 인권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유엔이 북한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는 방안을 재추진하며, 서울에 북한 유엔인권사무소가 개설되는 등 대북 압박이 거세지면서 체제 유지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실제 북한은 18일 ICC 회부 추진에 대해 “적대 세력의 무분별한 인권 대결 광기를 초강경 대응으로 짓눌러 버릴 것”이라고 반발하기도 했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
[한·미 정상회담 이후] 평화협정 제안 속내는… 더 죄어오는 압박에 北 ‘도발’ 접고 ‘탐색’ 나섰다
입력 2015-10-19 0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