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고세욱] 아픔 주니까 정부다?

입력 2015-10-19 00:30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2010년 말 발간된 이래 지금까지 200만부 넘게 팔린 초특급 베스트셀러다. 이 책은 좌절하고 방황하는 청춘에게 들려주는 따뜻한 조언들을 담아 2010년대 초반 많은 젊은이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현재 이 책과 저자에 대한 청춘들의 평가는 180도 달라졌다. 최근 한 방송인은 케이블TV 프로에서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냐”고 일갈했다. 커뮤니티포털 ‘디시인사이드’의 백과사전격인 ‘디시위키’에는 최근 이 책을 비꼰 ‘아푸니카촌충’이란 단어가 수록됐다. 아푸니카촌충은 ‘헬조선(지옥 같은 대한민국) 청년들의 체내에 있는 기생충’이다. 처음에는 체내 ‘희망’이 분비돼 건강해진 것처럼 착각하지만 이후 자포자기, 자살충동의 단계를 거쳐 막판에는 ‘꼰대’ ‘남탓’의 증상을 앓는다고 한다. 치료제는 ‘탈죠센정(한국탈출약)’밖에 없다.

한때 최고의 힐링 에세이와 멘토로 각광받던 이 책과 저자는 5년 만에 청년들에게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돼 버렸다. 무엇이 청년들의 마음을 이토록 삭막하게 변하게 했을까.

헬조선, 망한민국 등 올해 급속히 퍼진 유행어에서 보듯 지금 젊은이들의 가슴은 분노로 응어리져 있다. 이들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나기 어려운 양극화와 불평등, 비정규직의 현실을 접하면서 망연자실하고 있다.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자 근본 대책 없이 ‘노오력(노력하면 해결된다는 기성세대의 사고를 조롱하는 속어)’만 하라는 기성세대와 정부에 대해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내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정부는 최근 ‘임금피크제’ 등 각종 청년일자리 확대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올 하반기 대통령이 제기한 노동개혁 차원의 이 대책은 진정성을 의심받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이번 조치로 기업이 더 많은 청년을 채용할 수 있을지를 묻자 20대의 60.3%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는 청년들의 현 정부에 대한 믿음이 두텁지 못한 데 기인한다. 전임 정부에 이어 현 정부도 규제 완화 등 친(親)대기업 위주 경제 정책에 매진해 왔다. 인하한 법인세 회복 요구도 외면하며 대기업이 살아야 서민도 산다는 식의 낙수효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모 국회의원 자료에 따르면 10대 그룹의 청년고용 증가율은 2011년 6.4%에서 2014년 -2.9%로 추락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 4위, 저임금 노동자 비율 2위, 구직 단념자(니트족) 비율 3위 등 청년 앞에 놓인 소득 및 고용현실은 참담하다.

15일 한국은행이 전망했듯 우리나라는 올해 2%대 성장에 그치는 등 본격적인 저성장 시대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에 혜택주고 빚을 내 내수를 살리는 등의 개발경제식 패러다임은 바꿀 때가 왔다. 청년고용 차원에서 전체 고용의 88%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일자리의 질과 양을 개선할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동반성장위원회에서 제시한 초과이익공유제(대기업의 이익을 중소기업과 나누는 것)와 미완으로 남은 경제민주화 정책은 그런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강남 3구가 아닌 서울 외곽에 사는 기자의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은 10년 후면 이 사회와 맞닥뜨린다. 소위 ‘금수저(부유한 집안과 지역에서 자란 2세)’가 아닌 우리 아이들이 그때 바라볼 한국사회는 헬조선일까, 헤븐조선일까. 젊은이의 탄식과 절망이 넘치는 나라에 미래는 없다. 이대로 가다간 ‘(청춘에게) 아픔 주니까 정부다’라는 말을 듣지 말란 법이 없다.

고세욱 경제부 차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