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욱조 (12) 하나님의 자녀 되자 스스로 술집 공연 용납 안돼

입력 2015-10-19 20:25 수정 2015-10-19 21:14
장욱조 목사(왼쪽)가 1993년 아내 서경숙(왼쪽 두 번째), 김석균(세 번째)을 따라 태국 선교 여행을 갔을 때이다. 아카족 어린이들이 장 목사 앞에 앉아 있다.

연예인교회 남선교회는 성도들의 집을 순회하며 성경공부를 했다. 성도 20여명이 우리 집에서 공부하는 날이었다. ‘다 앉기엔 방이 좁네.’ 우리 부부는 안방을 아예 리모델링하기로 했다. 13.2㎡를 26.4㎡ 크기로 넓혔다. 남선교회나 성가대원들이 우리 집을 이용해 성경공부를 많이 하게 됐다. 나는 말씀에 천착하면서 연예계를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는 말씀이 나를 강하게 붙들었다. 음악의 창시자는 하나님이시고 창세전부터 천상에 음악이 있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내 뜻을 전했다. 아내는 “하나님이 노래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잖아요. 말씀을 배웠으면 더 열심히 살아야지요”라며 만류했다.

“하나님이 가수 장욱조를 불러 고목나무에서 생명나무로 바꿔주시지 않았소? 내가 하나님 알고 성령이 내게 임했는데 내가 성령 모시고 나이트클럽 이런 데서 노래 불러선 안 될 것 같아.” 나는 아내를 설득했다. 술은 한 영혼을 파괴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자녀 된 나로서는 이제 술집에서 일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아내는 내 뜻을 존중했다.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고 복음성가 부르는 일에 몰두했다. 1989년 기독교방송 CBS 간증프로그램 ‘새롭게 하소서’가 미주로 한 달 동안 투어를 했다. 고은아 민창기 권사님이 사회자였다. 찬양사역자 김석균을 이때 처음 만나게 됐다. 나는 그와 한 방을 썼다. 그는 내가 벗어놓은 양말을 주섬주섬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내가 빨면 됩니다. 놔두세요”라고 말했다. 김석균은 “당연히 제가 빨아드려야죠”라고 했다. 그는 내 양말과 옷가지를 깨끗하게 빨아 널었다. ‘연예계에서 후배가 선배들 양말 빨아주는 거랑 비슷한 건가? 교회에도 이런 문화가 있는 건가?’ 그런데 그의 위계질서는 다른 것 같았다. 정성스럽게 누군가를 섬기는 느낌이었다. ‘아 이 친구가 나를 섬겨주는구나.’ 나는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때만 해도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지만 마음 한 편엔 ‘내가 그래도 유명한 연예인인데…’라는 자부심이 깔려 있었다.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거나 친절을 베풀거나 섬기는 건 상상하지 못하는 때였다. 김석균이 먼저 손을 내밀고 나를 형제처럼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은 내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후 나는 김석균을 따라 자주 선교 여행을 갔다. 1년에 한두 차례 동남아시아 선교지로 가 선교사를 위로하고 후원을 했다. 1991년 아내와 함께 태국 북부 치앙마이 아카족이 사는 산골 마을로 갔을 때다. 1500m 이상의 고지대였다. 힘든 여정이었다. 우리는 그날 선교사의 안내로 산길을 따라 10시간 정도를 걸어갔다. 그곳에 원두막 교회가 있었다. 늦은 밤 어린아이들과 추장과 마을주민들이 우리 일행을 반기며 맞이했다.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과자를 나눠 주고 그들과 함께 교제하며 찬양을 불렀다. 나는 뜻밖에 놀랐다. 내가 부른 ‘할 수 있다 하신 이는’이란 곡을 그들 말로 바꿔서 따라 부르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원두막교회에서 잠을 청했을 때다. “꺼이, 꺼이….” 밤새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선교사에게 물었다. “어젯밤 내내 구슬픈 울음소리가 나던데 무슨 일이에요?” 선교사가 빙그레 웃었다. “마을 무당이 밤새 통곡을 했어요.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서 이제 자기가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지요. 오늘 제가 공연에 초대하려고요.”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