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풍경화 지우니 추상화가 되었네… 英 작가 토비 지글러 개인전

입력 2015-10-19 02:48
토비 지글러의 회화 ‘콘트롤 Z’(2015년. 알루미늄에 유채). 18세기 영국 풍경화가 토마스 게인즈버러의 작품을 알루미늄에 입혀 지우고 덧칠하고 다시 지우는 방식으로 그 흔적을 완전히 없앴다. 작은 사진은 토마스 게인즈버러의 ‘저녁 풍경’. PKM갤러리 제공

서정적인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은색 실크 천을 연상시키는 화면 위에 새털구름이 흘러가는 듯한 이미지, 보라색, 분홍색, 노랑색 등이 뒤섞인 색조는 몽환적이면서도 동양적이다. 이게 서구의 동시대 작가 작품이라니 놀랍다.

서울 종로구 PKM갤러리에서 영국 작가 토비 지글러(43)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영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이 작가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전시로 내달 8일까지 이어진다. 전시에 나온 회화 신작들은 알고 보면 거장의 작품을 ‘차용’한 것이다. 추상적 회화의 바탕에는 하나 같이 18세기 영국 풍경화가 토마스 게인즈버러(1768∼1771)의 작품 ‘저녁 풍경-농부들과 말을 탄 사람들’이 숨겨져 있다. 로코코 양식의 이 서정적 풍경화를 알루미늄 위에 씌운 뒤 지우고 단순화시켜서 이처럼 세련되고 현대적인 추상적 회화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지글러의 회화가 흥미로운 것은 캔버스 천 대신 알루미늄을 바탕으로 삼았다는 데 있다. 알루미늄의 금속성이 주는 차가움을 전혀 느낄 수 없고 되레 비단 같은 부드럽고 안온한 느낌이 난다. 최근 내한한 작가는 “캔버스 천과 달리 올이 없어 피부같이 매끈한 표면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설치, 비디오 등이 대세인 시대에 40대 작가가 고전적인 방법으로 평가받는 회화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회화가 갖는 마초적인 역사를 해체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회화는 르네상스 이래 미술의 주류 장르로서 견고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그가 작업의 바탕으로 삼은 게인즈버러는 영국 풍경화의 교과서 같은 작가. 그는 “게인즈버러의 작품을 지우고 새롭게 덧칠하고 다시 지워내는 작업, 그런 제스처는 회화가 갖는 마초성에 반기를 드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전시에는 조각 작품도 내놓았다. 삼각의 알루미늄 면들이 이어져 탄생시킨 조각은 돌덩어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돌이 주는 굳건한 무게감, 세월의 깊이 같은 건 없다. 회화에서 추구했던 마초성에 대한 반기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성격에서도 그의 회화와 조각은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지글러의 작품은 테이트 갤러리, 버밍엄 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02-734-9467). 손영옥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