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체제 선전에 모란봉악단과 청봉악단을 필두로 한 ‘북한판 걸그룹’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서구문화 영향을 받은 이들의 등장을 두고 한때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개혁·개방을 추진하려는 것 아니냐”는 기대가 많았다. 반면 지금은 ‘21세기형 체제 선전도구’에 불과하다는 분석이 더 우세하다.
북한에서 문화예술은 단순한 유흥이 아닌 정치적 수단이다. 음악과 회화, 공연 등을 통해 김씨 일가를 찬양함으로써 체제 정당성과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목적을 띤다. 이른바 혁명가극을 공연하는 ‘피바다가극단’과 ‘만수대예술단’이 1946년에, 군 합창단인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이 1947년에 창설되는 등 북한은 광복 직후부터 선전선동 수단으로서의 예술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서구 대중음악과 비슷한 형식을 띤 ‘경음악단’이 등장한 건 1980년대 들어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1년에 쓴 ‘음악예술론’에서 경음악을 “말 그대로 가벼운 음악으로서, 실내악이나 교향악과 구별되는 대중음악의 한 종류”라고 규정했다. 북한의 대표적인 경음악단은 왕재산예술단(1983년 창립)과 보천보전자악단(1985년 창립)으로, 모두 김 위원장의 지시로 결성됐다.
걸그룹으로 알려진 모란봉악단과 청봉악단 또한 크게 봤을 때 경음악단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차별점도 분명 있다. 북한 걸그룹의 시발점인 모란봉악단은 2012년 7월 시범공연 당시 미국 영화 ‘록키’의 주제가, 프랭크 시내트라의 히트곡 ‘마이웨이’ 만화영화 ‘톰과 제리’의 주제곡 등 미국 대중음악을 연주했다. ‘미키마우스’와 ‘곰돌이 푸’ 인형이 무대에 오르는 등 북한이 그토록 적대시하는 ‘미국 제국주의’의 문화를 적극 수용하겠다는 태도로 비쳤다.
북한판 걸그룹은 김 제1비서가 표방하는 ‘열린 음악정치’의 산물이다. 특히 서구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기존의 폐쇄적인 태도를 일정 부분 버린 것으로 보인다. 모리 도모오미 일본 리쓰메이칸대 코리아연구센터 전임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두 악단은 경음악 계열의 발전과 진화라고 파악할 수 있다”면서도 “타국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김 제1비서가 모란봉악단을 선보일 당시 북한의 개혁·개방을 시사한 것 아니냐는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김 제1비서 집권 4년차를 맞는 지금 이런 기대는 섣불렀다. 북한은 자신들이 ‘핵보유국’이라고 주장하며 일체의 비핵화 대화를 거부하는 등 국제사회로부터 더욱 고립됐다. 걸그룹 또한 체제 정당화를 위한 새로운 도구일 뿐 북한의 개방을 상징하는 건 아니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성기영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16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면서 기존의 선전선동 전략이 다변화되는 한편 서구 지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서 “군중집회 형식의 기존 선전 방식을 유지하면서 과거에 없던 방식도 활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 연구위원은 “이런 부분들은 제도 안에서 이뤄지는 변화이지 본질적이고 제도적인 개혁으로 보기 어렵다”면서도 “다만 북한 주민들에게 어떤 방식이 더 효과적으로 통할지 하는 고민 속에서 나온 것이어서 주민 의식을 반영하는 징표 정도는 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북한, 21세기형 체제 선전] 김정은 기획 ‘걸그룹 정치’
입력 2015-10-17 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