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걸그룹 정치’] ‘미제’ 본뜬 선전의 꽃… 삼촌팬도 있을까

입력 2015-10-17 02:45
북한 청중들이 11일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모란봉악단의 노동당 창건 70주년 축하 공연을 관람하며 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의 대중음악은 과거 경음악과 클래식 위주로 명맥만 근근이 이어진 정도였다. 김일성·김정일 시대의 체제 선전은 주로 이념과 군사력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3대(代)인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 시대에 접어들면서 '걸그룹'이 체제 선전의 첨병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김 제1비서가 조직한 모란봉악단과 청봉악단은 남측의 '한류 열풍'과 맞닿으면서 국제적으로도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도발적인 복장과 세련된 연주 덕에 어쩌면 남한에서도 이들의 '삼촌 팬'을 조만간 만나보게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변화의 시작, 모란봉악단=“경애하는 김정은 동지께서 문학예술부문에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새 세기의 요구에 맞는 모란봉악단을 친히 조직했다.” 북한 노동신문은 2012년 7월 9일자 신문에서 모란봉악단의 탄생을 이렇게 알렸다.

모란봉악단은 등장부터 ‘센세이셔널’했다. 같은 달 12일 시범공연을 마친 뒤 27일 전승절 경축 공연에 나선 모란봉악단은 북한 국가를 연주한다. 현악기 반주를 배경으로 국가 1절을 모든 관객과 합창한 직후 갑자기 드럼이 터지고 전자기타가 굉음을 터트렸다. 대담한 편곡으로 국가 2절을 부르는 모란봉악단을 보고 일부 관객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타기도 했다.

이처럼 모란봉악단은 등장하자마자 시대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악단의 관리자 외에 모두 여성으로 이뤄진 악단의 등장에 문화예술계는 물론 학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표현했다.

모란봉악단은 가수 10명, 연주자 14명이 모두 여성이다. 악기는 바이올린·첼로·키보드·신시사이저·피아노·기타·베이스기타·색소폰·드럼으로 구성됐다. 다만 전원이 한 무대에 나서는 대신 공연 성격에 따라 부분적으로 교체하며 무대를 선보인다. 선우향희(제1바이올린) 김향순(키보드)은 삼지연악단, 김영미(피아노·신시사이저)는 은하수관현악단 출신으로 구성원 대부분이 수준급 연주 실력도 갖추고 있다.

북한의 저명한 가수인 현송월이 단장을 맡았다. 현 단장은 황재산경음악단, 보천보전자음악단 등에서 활동했다. 황진영 부단장과 우정희창작실 실장도 만수대 예술단과 보천보전자악단 등에서 전속 작곡가로 활동한 실력자다. 따라서 모란봉악단은 전형적인 걸그룹이라기보다 여성 중심의 ‘팝 밴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인 바네사 메이처럼 전자 현악기를 사용해 팝 음악을 커버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됐다. 일본 교토대 미즈노 나오키 교수는 연구 논문에서 모란봉악단을 크로스오버 전자음악을 연주하는 여성 3인조 바이올린 트리오 ‘프린세스 오브 바이올린’에 비교하기도 했다. 무대에 북한이 적국으로 여기는 미국의 애니메이션 인형을 올리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체제 선전에도 적극적으로 동원됐다. 22회의 공연 대부분은 전승절 축하공연 등 정치적 성격이 짙은 것들이다. 레퍼토리도 ‘우리는 당신밖에 모른다’, ‘당을 따릅니다’ 등 호전적이고 애국심을 강조하는 내용이 많다. 인민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곡들도 눈에 띈다. ‘달려가자 미래로’, ‘행복의 래일(내일)’ 등 희망을 강조하며 밝은 곡조와 안무를 선보였다.

김 제1비서도 모란봉악단을 ‘음악 정치’의 메신저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22차례 공연 가운데 16차례를 직접 관람할 정도다. 부인인 이설주도 절반이 넘는 11차례의 공연을 관람했다. 악단 구성원들은 모두 북한군인이다. 현송월 단장(대좌)을 비롯해 가수와 연주자도 모두 소위, 중위, 중좌 등으로 구성돼 있다. 22회 공연 중 10회(48%)가 군 관련 행사였다.

‘인민의 걸그룹’ 청봉악단=모란봉악단의 성공에 힘입어 김 제1비서는 지난해 7월 금관악기 위주의 경음악단인 ‘청봉악단’을 선보였다. 7인의 여성 가수가 무대 전면에서 직접 노래를 부르면서 북한판 ‘소녀시대’란 별명도 붙었다. 왕재산예술단 출신 연주자와 모란봉악단 중창단 가수들도 악단에 포함됐다.

이들은 지난 8월 공훈국가합창단과 함께 러시아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당시 아이보리색과 검은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신’ 모습으로 등장해 이목을 끌었다. 북한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기념 공연도 열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방송은 15일 “인민극장에 청봉악단의 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군중이 차고 넘친다”며 “주로 각계층 근로자와 청년은 물론 외국 손님도 공연을 관람했다”고 전했다.

이들은 공연에서 ‘당을 노래하노라’ 등 노동당과 김 제1비서를 향한 충성을 서약하는 노래를 시작으로 ‘오 수잔나’와 러시어 처녀노래 연곡 등 외국 곡도 잇따라 선보였다.

모란봉악단과 청봉악단이 각각 과거 보천보전자악단과 왕재산경음악단을 계승한 것이란 분석도 있다. 이들은 모두 김 제1비서의 생모이자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출신인 고영희가 조직한 단체들이다. 두 악단은 모두 김 제1비서의 부인 이설주가 직접 활동을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설주 역시 인민내무군협주단과 은하수관현악단의 성악가 출신이다.

전자악단에서 걸그룹까지=북한의 대중음악은 그 뿌리가 깊지 않다. 주로 클래식과 가극단, 합창단 중심으로 운영됐다. 1946년 창단된 북조선가극단을 재창단한 피바다가극단과 1947년 평양예술단으로 출발해 92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뀐 국립민족예술단이 가극을 이끌었다. 클래식 음악 쪽에선 조선국립교향악단이 독보적 존재다. 이들은 2008년 미국 뉴욕 필하모닉과 평양에서 합동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이 외에도 윤이상관현악단, 은하수관현악단, 삼지연악단 등이 클래식 음악계에서 활동했다. 모란봉악단과 청봉악단 창단을 김 제1비서가 주도한 것처럼 은하수관현악단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직접 창단을 지시했었다.

합창단과 군악단은 모두 군 주도로 활동했다. 조선인민군 공훈국가합창단과 협주단·군악단 등이 대표적이다. 경음악은 83년 만수대예술단에서 분리된 왕재산예술단과 85년 창단한 보천보전자악단이 이끌었다. 보천보전자악단 역시 연주는 남성이, 가수는 여성이 담당했다. 왕재단예술단도 가수·연주가·무용가 등으로 구성됐으며 민요 등을 현대음악으로 연주했다. 공연에 여성 무용수가 등장하는 점이 이색적이다. 모란봉악단과 청봉악단은 이들의 사상적·정책적 영향 아래에서 등장한 북한의 ‘기획 걸그룹’인 셈이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