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수수, 뇌물공여, 배임수재, 배임증재…. “다 직무와 관련된 부당거래 아냐?” 생각하기 쉽지만 ‘검은돈’에 적용되는 죄명은 엄밀히 구분된다. 죄명이 다양한 것은 대개 수뢰자의 신분 때문이다. 공직자가 뒷돈을 받는 식의 ‘공공부패’에는 뇌물수수·공여, 민간 사업자끼리의 ‘민간부패’에는 배임수재·증재 혐의가 주로 적용된다.
그동안 수사·입법·연구 과정에서 부패의 주요 비중을 차지해온 쪽은 공공부패였다. 하지만 경제규모 확대, 민간 경제주체의 권한 강화 추세 속에서 최근 민간부패 규모가 공공부패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배임수재·증재 혐의로 법정에 서는 이들이 뇌물수수·공여 기소자 수를 추월한 것이다.
14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2013년 대표적 민간부패 범죄인 배임수재·증재로 재판에 넘겨진 이는 799명이었다. 공공부패 관련 뇌물수수·공여 기소자(486명)를 크게 웃돌았다. 배임수재·증재 기소자는 2005년을 제외하면 뇌물수수·공여보다 늘 적었다. 민간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각종 ‘관피아’ 단속과 대기업 비리 증가세 등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민간부패는 검찰 수사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악습을 버리지 못한 민영화 기업들의 수사 결과에서 자주 등장하는 혐의가 바로 배임수재·증재다.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부장검사 김석우)의 KT&G 수사에서는 고위직과 협력업체 대표가 짜고 납품단가를 유지해 수익과 뒷돈을 교환하는 식의 민간부패가 다수 포착됐다.
금품을 받은 이모(60·구속기소) 전 부사장, 구모(46·구속기소) 신탄진공장 생산실장에게 검찰이 적용한 혐의가 배임수재였다. 뒷돈을 건넨 한모(60·구속기소) 삼성금박카드라인 대표에게는 배임증재가 적용됐다.
배임수재·증재는 ‘오너 없는 기업’인 포스코 수사에서도 비자금 연루 임원들의 주요 혐의로 등장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조상준)는 포스코 계열사의 임원 다수가 하도급업체로부터 수주 청탁과 함께 검은돈을 받은 것으로 확인한 상태다. 포스코건설의 시모(56·구속기소) 부사장, 김모(55·구속기소) 건축사업본부 상무 등이 이 죄명을 받아들었다.
서울중앙지검 조사1부(부장검사 조종태)가 속력을 내는 재향군인회 수사도 결국 덩치가 커진 민간 친목단체의 부패를 밝히는 과정이다. 향군정상화모임이 “산하 기업체 대표들에게 금품을 받았다”며 조남풍(77) 회장을 고발할 때 거론한 혐의가 배임수재였다.
형사정책연구원은 “민간기업의 활동영역과 기능이 비약적으로 확대됐다”며 “민간부패가 공공부패보다 더 큰 사회적 위해를 초래하며 공공지출 증대를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하는 뇌물공여지수, 홍콩 연구기관 PERC가 조사하는 부패지수 등을 봐도 우리나라 민간부패 정도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에 법무부는 ‘제삼자 배임수재죄’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입법예고를 마쳤다. 부정한 청탁의 대가로 본인 대신 제삼자가 재산상 이익을 취해도 처벌하기 위해서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기획] ‘부패〓공직’ 옛말 민간 부패가 더 심각… 배임수재·증재 기소 건수, 뇌물수수·공여 앞질러
입력 2015-10-16 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