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주의 1318 희망공작소] 중2병, 病 아닌 성장통이랍니다

입력 2015-10-17 00:55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중2병, 그 실체가 증명되다’란 기사가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인성검사에서 중학교 2학년들이 타 학년에 비해 낮은 점수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중2들이 ‘자기조절’ ‘지혜’ ‘성실’ 덕목에서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낮은 점수를 보였기에 관련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는 건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 결과를 ‘역시 중2병은 존재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건 섣부른 해석이다.

문제는 ‘중2병’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15세 아이들을 ‘중2병’이라 부르는 사회 현상 그 자체다. 우리 사회는 중2로 대표되는 청소년의 행동들을 ‘병리적 패러다임’으로 바라보고 있다. 어른들의 눈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부정적인 면은 병으로 치부해 버린다. 이는 청소년들이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듣고 보기보다는 그들의 표현방식을 ‘시간이 지나면 낫는 병’으로 치부해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게 만든다.

아이들은 여러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과 상태를 표현하며 끊임없이 소통을 요구한다. 때론 이들의 소통은 어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를 개인의 병리로 치부하면 청소년들과의 소통은 더욱 요원해진다.

어른들 모두 청소년기를 지나왔다. 그 시절 일어났던 급격한 성장,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마구 올라오던 여러 생각과 감정, 어른의 말은 무조건 듣기 싫었던 거부감을 모두 희미하게나마 기억할 것이다. 그 시기 우리는 이해해주고 잡아줄 수 있는 ‘진짜 어른’을 얼마나 원했던가. ‘치료 대상’이라는 시각으로 청소년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이들과 소통할 길을 잃는다. 청소년들은 민감하다. 어른이 자신을 치료 대상으로 보는지, ‘성장 과정을 겪고 있는 또 다른 나’로 보는지 직감적으로 안다.

예수님은 모든 경계를 허물고 사랑하는 대상 속으로 들어가셨고 우리도 그렇게 하라 하신다. 누구를 만나건 각 사람 안의 ‘성장의 씨앗’에 집중하셨다. 이렇듯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람을 보셨기에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만나건 상대와 제대로 소통할 수 있었다.

중학생들은 우리 모두가 경험한 성장 과정을 치열하게 통과하는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다. 예수님처럼 성장의 씨앗을 바라보는 ‘성장 패러다임’으로 다가설 때 우리는 비로소 이들과 진정한 만남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영주(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15세상담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