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체르노빌의 목소리] ‘육성의 힘’을 보여주다

입력 2015-10-16 02:58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20세기 최대 참사인 체르노빌 원전 사고 피해 당사자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쓴 이 책은 일명 ‘목소리 소설’로 불린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작이기도 하다.새잎 제공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 발표로 출판시장에서 진짜 대박을 낸 건 소형 출판사 ‘새잎’이다.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2013년 독일 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국제무대에서 주목받았다. 이를 계기로 작가가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급부상하기 전인 2011년 이 책이 출간됐다. 새잎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우리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는 재난 문학을 살펴보다 보석처럼 숨은 이 책을 찾아냈다.

20세기 최악의 사고인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발생한 것은 1986년. 사고가 터진 지 1년 후 누군가 물었다. “다들 책을 쓰잖아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왜 아무것도 안 쓰시나요?”

작가는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원전사고가 터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과 멀지 않은 벨라루스 출신의 작가는 “지금은 나와 내 삶도 사건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하나가 되어 버려 떨어져서 바라볼 수 없게 됐다”고 말한다. 뭘,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고통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20년에 걸쳐 이 책을 쓰는 동안 작가는 발전소에서 일했던 사람, 과학자, 의료인, 군인, 이주민, 주민 등 무수한 사람들과 만났다. 그의 글쓰기 원칙은 이랬다. “운명은 한 사람의 인생이고, 역사는 우리 모두의 인생이다. 나는 운명을 보존하면서 역사를 들려주고 싶다. 한 사람을 잃지 않도록….”

시도, 소설도 아닌 ‘시적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적 산문’이라는 새 장르의 창출은 작가가 기자 출신이기 때문만은 아닐 터다. 창작 방식을 두고 고뇌 속에서 보냈을 무수한 불면의 밤이 보낸 선물일 것이다.

그의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말했다. “적어 두세요.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렇게라도 남겨두세요. 누군가 읽고 이해하겠죠. 나중에, 우리가 죽은 후에….”

사고 첫 날 밤, 원전의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대원과 해체 작업자들은 방호복도 없이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출동했다. 평범한 불인 줄 알고 출동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죽어가는 남편을 두고 병원에서 누군가는 말했다.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남편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전염도가 높은 방사능 물질이에요. 죽고 싶어요?”

“나의 무력함으로 인해 무너져 내려간다”는 심리학자의 고뇌 어린 독백과 “밭일을 할 때 손에 붕대를 감고 고무장갑을 끼고 일하라고 하더라. 땔감도 씻어야 한다더라”며 절망을 뱉어내는 농부…. 소설가의 어떤 미문도 날 것의 육성이 주는 고통스런 감동을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지구상에서 악몽은 되풀이 됐다. 2011년도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녀는 이렇게 진단했다. 사람들은 체르노빌을 전체주의의 결과로, 즉 소련의 핵 원자로가 불완전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핵 신화 자체는 엄청난 재앙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의 원전 사고는 체제가 문제가 아님을 증명했다.

오늘날 미국 프랑스 일본 등 30개국에서 443기의 원자력발전소가 가동 중이다. 그 가운데 한국에 21개가 있다. 책이 널리 읽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새로운 서술 방식으로 현실을 껴안는 작가의 글쓰기 방식이 주는 감동을 고려해볼 때, 한국의 작가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김은혜 옮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