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으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머릿속 조차 맑아지는 듯 하다. 사색에 젖은 시인의 감성이 아니더라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을 저절로 떠오르게 할 만큼 하늘은 높고 공기는 상큼하다. 기나긴 장마와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치열하게 견뎌낸 것만이 자연이 내주는 아름다운 결실로 온전히 보상받을 수 있는 가을의 문이 열렸다. 바야흐로 말도 살찐다는 식도락의 계절이다. 그러나 어떤 요리라도 제철 식재료를 써야 고유의 깊고 풍부한 맛과 향을 즐길 수 있으며 우리 몸을 이롭게 해준다.
그렇다면 유명 요리사들과 미식가들이 첫손으로 꼽는 세계의 진미는 무엇일까? 유럽인들은 거위 간, 푸아그라(fois gras); 철갑상어 알, 캐비어(caviar); 그리고 송로버섯이라 부르는 트러플(truffles)을 세계 삼대 진미로 지목하데 주저하지 않는다. 트러플은 검정색 트러플 (Tuber melanosporum)과 흰색 트러플(Tuber magnatum) 두 종류가 있는데, 공통적으로 그 향이 독특하고 무척 강해 한 번 맡아보면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떡갈나무나 헤이즐넛 나무 아래에서만 발견되는 트러플은 적당한 크기로 성장할 때까지 무려 7년이나 소요되며 그것도 땅속 30cm 깊이에 위치해 있어 훈련된 개나 돼지가 트러플을 캐는 데 동원된다. 어렵사리 트러플을 캐어낸 장소는 남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비밀에 붙인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송이 채취 꾼들이 자식에게도 그 자리를 알려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추석이 지난 가을 한철 이 때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단연 최고의 음식 사치는 송이 요리다. 개인적으로는 ‘송이’가 트러플보다 한 차원 높은 경지의 진미이며 이 세상 ‘버섯의 왕’이라 칭하고 싶다.
고려 중기의 문신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송이를 먹다’라는 시구(詩句)를 남겼는데 ‘소나무 훈기에서 나왔기에, 맑은 향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 향기 따라 처음 얻으니 두어 개만 해도 한 움큼일세, 내 듣거니 솔 기름 먹는 사람 신선 길 가장 빠르단다(得仙必神)’라며 신선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송이버섯을 먹는 것이라 극찬했다. 아마도 오묘하고도 그윽한 그 향기를 표현해 내기란 당대의 대문장가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을 것이다.
살아있는 적송(赤松)의 잔뿌리에서 영양분을 빨아들여 발육해야 하는 활물기생균(活物寄生菌)인 까닭에 인공재배가 불가능한 이 가을의 진객은 그윽한 솔 향과 더불어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독특한 식감을 자랑한다. 송이는 영양학적으로도 단백질과 비타민 그리고 무기염류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식품이다. 특히 비타민 A, B6, C, 치아민, 니아신, 리보플라빈과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적혈구 생성을 촉진하고 심장보호 및 근육강화 효과가 있다.
송이의 주요 주성분인 베타글루칸은 다당류(polysaccharides AB-P and AB-FP )로서 뛰어난 항암 효과를 가지고 있다. 항암 효과 이외에, 최근에는 식물성 다당류를 섭취시킨 실험동물에서 유해산소를 제거하고 염증반응을 억제하는 효과가 입증됐다. 또한 면역체계를 강화시켜 신경세포 노화를 막았으며 인지기능도 향상시켰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이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송이 향에 취해 신선의 길로 들어서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 신선의 경지에 이르면 치매는 저 멀리 꼬리를 감추고 말리라.
한설희 건국대병원 신경과 교수
[한설희 칼럼] 가을의 진객 ‘송이’… 신경세포 노화 막아 인지 기능 보존에 큰 도움
입력 2015-10-19 0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