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손영옥] 국립현대미술관의 허드렛일

입력 2015-10-15 00:20

같은 장관 밑에서 일어난 일이 맞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정진후(정의당) 의원은 뜻밖의 사실을 밝혀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관장 공석을 틈타 관장의 인사권을 박탈하고 주요 운영 권한을 축소하는 내용으로 ‘국립현대미술관 기본 운영규정’을 개정했다는 것이다. 개정 시점은 놀랍게도 6월 1일이다.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8월 말 이 기관의 법인화 재추진 의사를 밝히기 약 두 달 전이다. 규정 개정은 법인화를 통해 정부 조직체계 안에 갇힌 현 미술관에 재정과 인사상의 독립성을 부여하겠다는 정부 청사진과 거꾸로 행보가 아닌가.

골자는 두 가지다. 우선 인사위원회 위원장을 관장에서 문체부가 파견한 공무원인 기획운영단장으로 바꾸었다. 관장은 인사위원에서도 배제됐다. 둘째, 관장이 가지던 작품수집심의위원회 위원장직도 외부 전문가에게 넘겼다. 관장은 심의위원에서도 빠졌다. 기타 조항에서 ‘문체부와 사전 협의를 거쳐’라는 문구가 추가됐다. 정 의원 측은 “국립현대미술관을 문체부의 허수아비 기관으로 전락시켰다”고 주장했다.

문체부는 기관장이 아니라 부기관장이 인사위원장을 맡고 있는 타 기관(국립중앙극장, 한국정책방송원, 국립중앙박물관 등)과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해명했다. 또 5급 이상의 인사는 본부(문체부) 소관이라 인사위원회가 하는 일은 6급 이하 인사 관련 ‘실무적 업무’에 그친다고 답변했다. 오히려 “관장의 번다한 역할을 덜어내고 창의적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개정했다”는 논리를 폈다. 인사위원장이 된 기획운영단장은 “인사위원회가 하는 일은 한마디로 하면 허드렛일이다. 그걸 굳이 관장이 할 필요가 없다”고까지 했다. 인사위원회에서 조직원의 채용·승진·포상·징계 등이 심의된다.

형평성 논리는 그럴싸하게 들린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은 조직 위계구조가 다르다. 사례로 든 다른 기관에서는 기관장과 부기관장의 계급 차가 확실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관장과 기획운영단장이 같은 계급장인 나급(2급·국장급)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A씨는 “3년 임기를 채우기도 쉽지 않은 관장이 제대로 일하려면 더 큰 권한을 줘야 할 판인데, 인사위원회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관장 말을 누가 듣겠느냐. 누구 줄을 서겠느냐”고 꼬집었다. B씨는 “감봉되고 좌천되는 중요한 일들이 거기서 다 결정된다. 그런 게 어떻게 허드렛일이냐”며 흥분했다. C씨는 “요식적 일을 한다고 해도 상징성 있는 자리다. 그 상징성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나온다”고 말했다.

인사가 만사라는 건 ‘장그래’ 같은 신입도 아는 조직 논리다. 가장 큰 무기인 인사권이 불안하면 어떤 빛나는 아이디어도 현실화시키기 쉽지 않다. 관장은 창의적인 일에나 몰두하라는 얘기는 그래서 어불성설이다. 그러면서도 미술관의 핵심 업무인 작품수집 심의에서 관장을 배제하는 것은 또 뭔가. 미술계 관계자는 “현대미술은 관장의 시각이 정말 중요하다. 뉴욕현대미술관(모마) 같은 유수의 미술관을 보라. 관장 재임기간 중 뭘 컬렉션했는지가 가장 평가받는 업적”이라고 말했다.

안팎에서 비난 여론이 끓고 있는데도 문체부는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김 장관은 13일 “관장 자리는 직급이 국장에 불과할 뿐인데 이상하게 핫이슈가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미술계 관계자는 “법인화 의지가 있다면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행보, 이런 구설이 의구심을 갖게 한다. 문화융성은 정부의 외침이 아니라 현장에서 권한과 책임을 갖는 수장의 역량에서 실현된다.

손영옥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