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카자흐스탄 몽골 방글라데시 레바논 예멘 알바니아 말라위 에티오피아 아이티…. 지난 10일 막 내린 제14차 의료선교대회에선 땅끝까지 찾아가 이방인을 섬기는 의료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역도 상황도 다르지만 ‘그곳으로 가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한국에서의 안정된 삶을 내려놓고 나그네로 사는 1968년생 동갑내기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시리아 난민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대영(47) 선교사는 2013년부터 국제의료구호기관 ‘글로벌케어’의 레바논 지부장으로서 난민들에 대한 의료지원 사역을 하고 있다. 수도 베이루트 인근 작은 진료소에서 시리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의 건강을 살핀다. 격주 토요일마다 레바논 현지 의사들과 함께 인근 4개 지역을 순회하며 이동진료도 하고 모자보건을 위한 예방교육도 한다.
현장에서 보는 난민의 삶은 처참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그는 “시리아에선 도저히 살 수 없으니 가다가 죽더라도 떠나자며 국경을 넘는다”면서 “먹을 게 없어 굶어 죽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선교사는 역설적으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봤다. 시리아는 서방 선교사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땅. 시리아인 대다수는 기독교 복음이 무엇인지 평생 들어보지 못한 이들이다.
이 선교사는 “시리아 난민들은 인간의 탐욕이 빚은 전쟁에서 고통 받고 상처 입은 가운데 평생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을 만나 섬김을 받고 있다”면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영적으로 회복시켜 주시리라 믿는다”고 했다.
지난해 진료소를 거쳐 간 난민만 3000여명.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2∼3년 동안 직간접으로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을 만나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레바논에도 교회가 있지만 이슬람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는 쉽지 않았다”면서 “그들도 시리아 난민을 도우면서 새롭게 도전받고 있다”고 했다.
부산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전주예수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한 뒤 전북대에서 석·박사학위를 받고 군산에서 4년간 의사로 일했다. 레지던트로 있으면서 의료선교사로서 비전을 품게 된 그는 선교훈련을 받은 뒤 2005년부터 6년 넘게 폐쇄적인 중동의 A국에서 아내와 함께 사역했다. 2012년 안식년을 맞아 떠나 있는 동안 ‘아랍의 봄’으로 지역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돌아가지 못하고 대신 찾아간 곳이 레바논이다.
중동에서 선교사로 사는 것, 두렵지 않을까. 그는 “사람들은 선교사가 되면 모든 걸 포기하고, 죽음까지 각오해야 한다며 두려워한다”면서 “하지만 내가 경험한 선교사역에는 한국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는 기쁨과 차원이 다른 큰 기쁨이 있다”고 말했다. 이 선교사는 특히 마태복음 13장 44절, 천국을 숨겨진 보화에 비유하는 말씀을 좋아한다. 그는 “내가 믿음으로 한 걸음 뗄 때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 있으니 두려워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다.
◇잊혀진 아이티에서 만난 예수님=김성은(47) 선교사의 사역지는 중남미 카리브해의 아이티. 그곳에서도 ‘잊혀진 아이티’라고 불리는 라고나브 섬이다. 12만명이 살고 있지만 전기 보급률 0%, 4인 가족의 하루 수입이 1달러가 채 되지 않는다. 정부에서도 정치범이나 전염병 환자들을 격리시키는 곳으로 활용할 정도다. 김 선교사는 본토인들도 좀처럼 가려 하지 않는 이 땅을 3년 전 밟았다.
그가 처음 생각했던 사역지는 인도나 베트남이었다. 하지만 2010년 아이티 대지진이 나고 1년 뒤 하나님은 ‘아이티로 가라’는 음성을 들려주셨다. ‘도대체 왜’라는 의심을 품고 일주일 일정으로 아이티를 찾은 그의 마음에선 끊임없이 ‘하나님, 여긴 아니죠? 다른 곳으로 갈게요. 이렇게 참혹한 땅에선 못하겠어요’라는 항의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흘째 되던 날 차창 밖으로 굶주린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우는 아이들 가운데 예수님이 서서 ‘나를 따라오겠다고 하더니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듯했다”며 “결국 그곳으로 가게 됐다”며 빙그레 웃었다.
섬에는 하수도와 화장실이 없어 콜레라 같은 수인성 질환이 많았다. 장티푸스 콜레라 이질 등이 사망 원인의 50%를 차지했다. 섬 전체에 하나 있는 병원은 의료비가 비싸서 현지인은 이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심지어 교회 목사도 아프면 부두교 사제를 찾아가 굿을 할 정도로 부두교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김 선교사는 천막 진료소를 세워 환자들을 치료하고 오토바이로 섬을 누비며 이동진료를 시작했다. ‘어떻게 섬을 섬길까’ 고민하던 끝에 12개 마을에서 1명씩 청년들을 뽑아 마을보건요원으로 키우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두 달간 남녀 청년 6명씩을 모아 오전에는 성경 교육, 오후에는 기초적인 보건 교육, 저녁에는 예배를 드리며 훈련을 했다. 이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콜레라 예방 교육을 하고 환자가 생기면 김 선교사에게 연락하는 등 협력하고 있다.
그는 화장실을 짓고 우물에 필터를 설치하는 사업도 하고 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성경보급운동도 펼친다. 그는 “아이티에선 성경이 10달러로 매우 비싸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며 “성경읽기를 핵심 사업으로 펼치려 한다”고 말했다.
김 선교사는 경상대 의대 재학 중 하나님을 만나면서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서울 영등포역 인근에서 12년간 가정의학과 개업의로 일하다 2011년 국제예수전도단에서 훈련 받은 뒤 자비량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미션&피플] ‘땅끝’ 이방인 섬기는 68년생 동갑내기 이대영·김성은 의료선교사
입력 2015-10-14 00:47 수정 2015-10-14 1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