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지역 전체를 혼란과 유혈로 빠뜨린 시리아 내전은 10대 학생들의 낙서에서 시작됐다. 2011년 3월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 기운이 중동 전 지역으로 확산될 무렵 10대 학생들이 시리아 남부 소도시 다라의 한 학교 담에 혁명 구호를 적었다가 체포돼 고문을 당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평화시위가 시작됐고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유혈 진압한 게 도화선이었다. 시위가 확산되자 알아사드 대통령은 다음 달 21일 48년간 지속한 국가비상사태를 해제하는 등 유화 제스처를 취했지만 국민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7월 들어서는 전차와 항공기까지 동원한 정부군의 무차별 폭격과 포격으로 수백명이 사망했고 반정부군이 조직되는 등 내전 양상으로 비화했다.
하지만 시리아 국민들의 저항의 근원에는 1971년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하페즈 알아사드부터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 현 대통령까지 지속돼온 아사드가(家) 장기 독재에 대한 불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종파(宗派) 간 차이도 사태를 격렬하고 돌이킬 수 없게 만든 요인이다. 알아사드 정권의 핵심 지지층은 이슬람 시아파의 한 분파인 알라위파 신자들이다. 하지만 시리아 인구에서 알라위파는 10%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대다수 국민은 이슬람 수니파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당초부터 시리아 내전은 ‘국제 대리전’의 성격이 있었다. 시아파의 종주국인 이란은 알아사드 정부군에 자금과 무기, 병력을 지원했고 수니파의 종가격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대부분이 수니파인 시리아 반군을 지원했다.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도 시리아 내전을 탯줄로 탄생한 괴물이다. 당초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하부조직으로 이라크에서 활동하던 이 단체는 시리아 내전에서 온건 반군과 대립하며 세력을 키웠다.
세력을 급격히 확장한 IS는 지난해 6월 이라크 제2 도시 모술과 인근 유전 지역을 점령하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내전이 시리아 국경을 넘어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는 신호였다. IS는 같은 달 29일 이슬람 지도자 칼리프가 통치하는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IS 창설 등 시리아 내전 악화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는 주장을 놓고 앞으로도 논란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오바마 대통령은 사태 초기인 2011년 8월 알아사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고 반알아사드 세력에 힘을 실어줬지만 군사적 지원에는 소극적이었다.
알아사드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이 ‘금지선(red line)’이라고 공언한 화학무기를 사용했음에도 미 의회에 결정권을 넘기는 방식으로 군사 개입을 회피했다.
리언 패네타 전 미 국방장관은 물론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각자의 회고록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시리아 내전에서 좌고우면하며 시리아 반군 지원을 외면해 IS 같은 극단주의 세력이 반군의 주력이 되었다’고 비판했다.배병우 선임기자
bwbae@kmib.co.kr
[美·러 대리전된 시리아] 시리아 왜 화약고 됐나… 10대 소년들 낙서가 도화선
입력 2015-10-14 0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