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가슴 먹먹한 역사의 현장이다. 1637년 1월 30일 조선 16대 임금 인조는 산성 우익문(서문)을 나서 한강 동쪽 삼전도(송파구 삼전동 일대)로 갔다. 오랑캐라 여겼던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린다는 뜻)를 했다. 인조의 이마에는 피가 흥건했다. 이로써 10만 청나라 군대의 느닷없는 진군에 황급히 한양을 떠나 산성으로 피신한 지 47일 만에 병자호란이 일단락됐다.
이보다 앞서 남한산성은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진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천연 요새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통일신라 때는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가는 치욕을 당하면서 남한산성은 다시 축조됐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입을 막아낸 현장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성벽은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와 연결돼 있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 반면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조건을 갖춰 외침에 의해 정복당한 적이 없다.
먼저 왕의 임시거처인 남한산성 행궁을 둘러보자. 전쟁 중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인조4년(1626)에 지어졌다. 조선의 행궁 가운데 종묘와 사직을 둔 유일한 곳이다.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해 상궐 및 좌전이 복원됐다. 일부 건물지에서 초대형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중요한 유적이다.
남한산성 긴 성곽 위에도 가을이 내려앉았다. 해발 500m의 험준한 지형을 따라 11.7㎞(본성 9㎞, 외성 2.7㎞)의 성벽이 구불구불 역동적으로 뻗어 있다. 트레킹은 남문(南門)이자 정문인 지화문에서 시작한다. 1636년 12월 14일 새벽 도성을 버리고 달아난 인조의 행렬이 들어갔던 문이다. 여름 내내 녹음을 드리웠던 지화문 앞 느티나무도 가을색으로 갈아입고 있다.
성벽은 능선을 타고 이어져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당하다. 남한산성 성벽길 한 바퀴는 늦은 걸음으로 3시간30분∼4시간이다. 흙길을 걷고 돌계단도 오른다. 영춘정에 닿을 무렵 뒤돌아보면 눈이 호강한다. 성벽이 산세에 맞춰 오르내리며 미끈하게 굽어 있다. 이어 수어장대. 산성 안에 남은 건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세운 건물이 장대다. 산성 안에는 총 다섯 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2층으로 지은 건물이 옹골차고, 굵고 진한 현판의 필치에 힘이 넘친다. 수어장대 옆 보호각에 보존된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도 놓치지 말고 보자. 병자호란의 시련을 잊지 말자는 의미를 담아 영조가 지은 글이다.
수어장대에서 15분쯤 더 가면 서문(우익문)이 나온다. 우익문 옆 언덕에서는 서울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청계산, 관악산, 대모산, 남산, 북악산, 북한산, 아차산, 도봉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서울 풍경이 압권이다. 시야가 좋은 날이면 인천 앞바다도 아스라하다. 가까이로는 공사 중인 제2 롯데월드의 모습도 뚜렷하다. 남문에서 서문을 거쳐 북문에 이르는 탐방로 주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1주년을 맞아 제20회 광주남한산성문화제가 오는 16일부터 18일까지 남한산성 일원에서 열린다. 크게 행궁, 병영, 조선 문화존으로 구성해 역사적 인식을 재조명한다.
행궁 문화존에서는 왕실시찰퍼포먼스, 한남루 근무교대식 퍼포먼스와 취고수악대 공연, 호패 만들기 체험 등이 열려 마치 조선시대로 회귀한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과거시험 재연, 조선 전통 무예 시범, 한양 저잣거리 재연 등 조선시대의 역사·문화도 체험할 수 있다.
남한산성을 봤으면 광주시 퇴촌·남종 일대의 팔당호를 찾아보자. 팔당호 주변도로는 호수를 휘돌아 조성돼 수려한 풍광과 드넓은 호수를 볼 수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 주목받고 있다. 퇴촌면 정지리에는 경안천 습지생태공원이 있다. 습지를 따라 잘 정돈된 산책로를 걸으며 동식물을 관찰할 수 있다. 특히 다양한 수생식물과 각가지 철새와 텃새가 서식해 조류관찰과 자연학습의 장으로 거듭났다. 광주=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