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윤석헌] 자발적인 금융혁신이라야

입력 2015-10-14 00:20

19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월터 베이지홋은 금융이 마치 흐르는 물처럼 경제의 부족한 곳부터 채워서 결국 평형을 이루는 그런 역할을 수행한다고 설명했다. 금융이 일국의 경제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상품과 서비스, 기관, 시장 및 제도 등 금융적 수단과 방법으로 해결함으로써 수요자 만족을 높이고 더 나아가 경제의 성장·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최근 정부가 금융개혁 추진에 속도를 내면서 베이지홋이 설명한 부족한 곳부터 채우는 금융의 역할이 새삼 아쉽게 느껴진다.

오늘의 한국 경제와 사회가 금융에 요구하는 역할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략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중소기업과 벤처·창업 등 차세대 성장산업을 발굴하고 내수산업을 지원하여 국가경제의 지속성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둘째, 기업으로부터 창출되는 과실을 가계로 전달하여 부채관리를 자산관리로 바꾸고 소득과 소비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다. 셋째,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금융 스스로도 독립 산업으로 성장·발전하여 국부 창출에 기여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금융은 이런 과제들에 대해 혁신적이고 안정적인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시대적 사명을 다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한국금융이 이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정부가 추진하는 금융개혁에 일말의 기대를 걸어본다.

그간 정부가 추진해온 금융개혁은 금융 보신주의 관행과 현실안주 영업행태 개선, 자본의 선순환 구조를 통한 벤처·창업기업 지원 강화, 새로운 금융모델 도입 등 주로 창조경제 지원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지난 5일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나서 “우리 경제의 혈맥인 금융이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도록 낡고 보신적인 제도와 관행은 과감히 타파하고 시스템 전반에 경쟁과 혁신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힘을 실었다.

얼핏 이들 개혁과제는 한국경제가 금융에 요구하는 역할로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을 서둘러 하향식(톱다운)으로 추진하려 함으로써 실효성을 낮춘다는 데서 발생한다. 창조경제 하에서 정부가 추진해온 혁신금융과 기술금융, 핀테크와 인터넷뱅크 등은 사실 금융소비자 니즈를 토대로 금융회사 내부에서 경영전략으로 추진할 사업들이다. 그런데 정부가 이들을 정한 후 금융회사의 지원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금융회사의 창의성과 혁신성을 기대하기 어렵고 따라서 실효성이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가 금융회사보다 금융고객 니즈 정보에 밝지 못한 상황에서 이러한 하향식 추진은 금융을 실물경제 활성화 수단으로 사용하는 관치의 재현에 다름 아니다.

효과적인 교육은 스스로 깨우치도록 돕는 것이다. 금융개혁도 같다. 하향식 관치방식 대신 금융회사 스스로 고객 니즈를 토대로 상향식(보텀업) 문제해결 방식을 채택하도록 이끌어야 부족한 곳부터 채우는 베이지홋의 금융이 가능해질 것이다. 우리가 금융개혁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금융의 체질을 바꾸고 역량을 길러 경제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금융혁신을 가능케 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제도적 장치 보완이 필요한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금리와 수수료 등 가격 결정권을 시장에 돌려주는 것과 낙하산 인사 등을 막고 금융회사의 책임경영체제를 보장함으로써 금융자율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따른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금융감독 역량 강화도 빼놓을 수 없다.

말을 물가로 데려가도 물을 먹는 것은 말의 몫이다. 마찬가지로 금융회사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도록 하지 않으면 금융개혁이 금융혁신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윤석헌(숭실대 교수·금융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