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반. 대학에서 좋아하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게 되면서 오히려 답답하고 막막한 느낌이 시작되었다. 내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 미술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에 대한 질문이 계속해서 떠올랐으나 답은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정치와 사회가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라 고민의 두께는 불어났다.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동료 작업실에 놓여있던 화가 박생광의 두꺼운 화집이 눈에 들어왔다. 양손으로 겨우 들 수 있는 무게의 책을 무릎 위에 놓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명성황후나 전봉준의 동학 농민전쟁 같은 역사의 주인공, 우리 삶 속의 구체적인 인물이 부각되어 있었다. 인물과 배경이 한데 엉킨 대담한 평면 구성에 울긋불긋한 오방색의 화려한 색채가 나의 눈을 붙들고 있었다.
모방에서 창조가 나온다고 했던가. 창작의 한 방편은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자기의 것이 될 때까지 사숙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 결에 자신이, 자신만이 그릴 그림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일단은 앞선 이들과 거장의 작품을 가슴속에, 뇌리에, 손길 속에 축적하고 숙달시켜 자기의 일부로 끌어들인 다음 창조적 감성이 시작된다. 창조가 따르지 않는 단순한 모방은 예술가에게는 헛일이다.
긴 시간 박생광의 화집을 놓지 않았다. 놓을 수가 없었다. 두꺼운 화집의 책갈피가 다 넘어갈 즈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일생이 기록된 연대기의 끝에는 팔순의 나이임에도 대작을 바닥에 깔아놓고 작업하는 광경이 나와 있었다. 당시에는 마흔을 넘기면 뒷짐을 지고 어설픈 노련미를 자랑하던 때였다. 마흔 살의 두 배나 되는 나이가 될 때까지 작업을 이어간 것이 놀라웠다.
미술을 공부하는 동안 나는 화집이라면 대부분 외국에서 출간된 외국 작가의 것을 보아왔던 터였다. 값비싼 원서를 구하느라 들인 비용도 적지 않았다. 우리 작가로는 짧고 천재적인 삶을 살다간 몇몇 작가밖에 없었다. 박생광은 일본풍의 그림이라는 편견을 극복하며 붓을 들 힘이 있을 때까지 작업을 쉬지 않았다. 거대한 충격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이임에도 지금까지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가슴속의 스승이 되었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이영 미술관의 김이환 관장은 일찍부터 우리 작가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 왔다고 한다. 그는 박생광을 77년 처음 만났다. 처음에는 단순히 화가의 그림만 좋아하는 애호가였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화가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도록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는 후원자로 변했다. 박생광의 대부분 걸작들이 탄생한 시기는 세상을 떠나기 전인 85년부터 10여년에 집중되어 있다. 김이환 관장은 특히 이 시기에 박생광이 작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화가가 경제적인 부담을 갖지 않고 작업한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적당한 긴장과 결핍이 절실한 작업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미술사 속에는 생활고와 처절한 외로움으로 만들어진 작품도 많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함으로써 자칫 사라질 수도 있는 인류 문화의 정화를 낳게 한 사람들이나 단체가 많아서 나쁠 리는 없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이 대표적인 예다.
나는 그 많던 예술 후원자들이 지금 모두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느냐며 푸념 섞인 말들을 농담처럼 말하고 다닌 적이 있다. 지금 어느 하늘 아래 구석진 곳에서 밤을 밝히며 붓을 들고 있을 수많은 젊은 박생광이 있다. 그들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밝은 눈만 있으면 된다.
최석운 화가
[청사초롱-최석운] 화가와 후원자
입력 2015-10-14 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