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욱조 (9) 한 번만 같이 가자는 아내 따라 연예인교회에

입력 2015-10-15 00:48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일할 때 동료 작곡가들과 함께한 모습. 장욱조 목사(앞줄 가운데)는 1981년 ‘신중현과 엽전들’의 리더 신중현과 같은 전속계약금을 받고 지구레코드 전속작곡가가 됐다.

나는 영국의 유명 그룹 비지스의 스타일을 모방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항변할 기회도 없이 ‘왜 몰랐을까’는 금지곡이 되었다. MBC는 1981년 창사 기념으로 한국가요 60년사에서 1000곡의 히트곡을 발표했다. 10곡 이상의 히트곡을 낸 작곡자는 18명이 있었다. 가장 많은 히트곡 작곡자는 박춘석(57곡) 박시춘(49곡) 길옥윤(34곡)이었다.

나는 12곡의 히트곡을 발표한 작곡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때는 저작권료 지불이 제대로 안 됐기 때문에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 격이었다. 나는 가난한 작곡가 겸 가수에 불과했다. 앙드레김 패션쇼 무대에 서기도 했다. 앙드레김은 그때에도 당대 최고의 배우나 가수 등 연예인을 모델로 세우길 좋아했다. 겉보기엔 화려했지만 나는 점점 빚에 쪼들렸다.

처음엔 처가의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 아내는 여기저기 빚을 얻으러 다녔다. 어느 날 아내가 친구 김명지 집사의 집에 돈을 빌리러 갔다 왔다. “여보, 오늘 돈을 만들어준 친구가 제게 교회에 나가보라고 하네요. 이번 주일 교회에 같이 가볼래요?” 아내가 처음 교회에 가자고 한 그 날짜를 잊지 못한다. ‘1986년 3월 22일 토요일.’

원불교 집안에서 자란 아내가 먼저 교회에 가자고 했을 때 문득 고은아 권사가 떠올랐다. 80년 KBS 방송국에서 녹화를 마친 뒤 고 권사를 마주쳤을 때 내게 전도를 했다. 나는 나가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았다. 그 교회가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있는 연예인교회(현 예능교회)였다. 그래서 나는 “이왕이면 연예인교회로 가지. 데려다줄게”라고 했다.

다음날인 23일 아내를 교회 앞에 데려다주고 난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그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설교 말씀을 듣고 펑펑 울었다고 했다. 울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했다. 그 다음 주일을 앞두고 아내가 내게 한 번만 교회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인들이 내게 교회에 가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여든까지 노래 부르는 ‘딴따라’로 살다가 노래 부를 힘 없어지면 그때 교회 갈 거예요. 예수 믿고 천국은 갈 거니까 걱정 마십시오.” 연예인은 생활이 불규칙적이기 때문에 주일 예배 참석 등 신앙생활이 어렵다는 핑계였다. 그런데 아내의 간곡한 부탁에 나는 교회에 가기로 했다. 대신 단서를 달았다. “오늘 한 번만 갈 거야. 난 여든에 갈 거니까 당신만 애들 데리고 다녀!”

나는 아내가 교회에 가는 건 좋다고 생각했다. 나이트클럽에서 일할 때 유부남이나 유부녀가 다른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을 자주 봤다. 대개는 배우자에게 정서적으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아내가 교회에 다니면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다음 주일인 3월 30일, 아내와 함께 처음으로 연예인교회에 나갔다. 고은아 권사님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그날 고 권사님은 예배 후 나를 새신자로 소개하며 6년 전 내가 바람맞힌 일을 얘기했다. “제가 장욱조씨를 교회 문 밖에서 40분 동안 기다렸어요.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예배당으로 들어와 하나님께 장욱조씨를 우리 교회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6년 만에 응답이 됐네요”라고 하자 성도들이 크게 박수를 쳐 주었다. 고 권사님은 우리 부부에게 점심을 대접하시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자고 했다. 그 다음 주일엔 ‘밥까지 얻어먹었는데 한번은 더 가야지’라며 교회에 나갔다. 그런데 이번엔 성가대원인 가수 서수남 장로와 탤런트 이영후 장로에게 붙들렸다. “하나님은 찬양 들으시는 것을 가장 기뻐하세요. 찬양하면 하나님이 앞길을 열어주시고 축복해주십니다.” 결국 나는 성가대 테너 파트를 맡게 되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