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장학금 받으면서 대학 다녔어.” 그동안 이 말에 담긴 뜻은 “나, 대학 다닐 때 공부 잘했어”였다. 우리 사회에서 ‘장학금’은 ‘우수한 학업성적’을 의미해 왔다.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에는 모두가 장학금이 필요했다. 한정된 장학금을 공평하게 지급하기 위한 선별기준이 있어야 했고, 그래서 성적장학금은 당연하게 여겨져 왔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장학제도는 기형적 시스템이 됐다. 당장 학업을 잇기 어려운 학생이 각종 자격조건 때문에 장학금을 못 받기 일쑤이고, 아르바이트 대신 공부에 전념하는 잘사는 집 학생이 성적장학금을 휩쓰는 모순이 빚어졌다.
고려대의 장학제도 개편은 우리나라 장학금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조치다. 성적 우수자에게는 경제적 보상 대신 명예를 부여하고, 장학금은 필요한 학생에게 먼저 주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 장학금
대학의 장학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성적이 높으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심리를 자극하는 ‘성적장학금’과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의 필요에 맞춰 주는 ‘생활장학금(저소득층 장학금)’이 그것이다. 무게중심은 성적장학금에 있다.
최근 들어 ‘반값등록금’ 요구가 거세지면서 2012년 국가장학금이 신설됐지만 여전히 성적은 장학금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성적장학금과 생활장학금의 액수 차이도 크다. 대학알리미에 따르면 홍익대는 지난해 학생 1인당 성적장학금으로 110만원을 줬지만 생활장학금은 67만원에 그쳤다. 성균관대의 경우 성적장학금은 109만원, 생활장학금은 42만원이었다. 다른 대학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렇게 된 것은 일본의 교육제도를 그대로 받아서다. 이수연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고등교육 지원이 미비한 일본의 교육제도가 한국에 그대로 수혈됐다”며 “광복 이후 모두가 저소득층인 상황에서 한정된 장학금은 주로 성적에 의해 배분됐다”고 분석했다. 일본의 경우 대학의 교내 성적장학금 비중(2008년 기준)은 전체의 40.7%에 이른다. 반면 생활장학금 비중은 24.0%에 불과하다.
이런 성과 위주의 장학제도는 장학금이 갖는 재분배 기능을 약화시킨다. 집안형편이 어려운 학생은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활비와 학비를 벌다 보니 상대적으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장학금이 없어도 학업에 지장이 없는 학생이 성적장학금을 받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빚어진다.
승자독식 구조를 깬다
고려대가 성적장학금을 폐지하는 것은 이런 승자독식 구조에 대학이 일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학업이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줘 재분배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같은 금액이라도 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에게 지급해 효용을 극대화하는 한편 실질등록금을 낮추자는 생각도 담겨 있다.
지난 3월 취임한 염재호 총장이 이 개편을 직접 추진하고 있다. 염 총장은 최근 교직원 간담회에서 “선진국 대학은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지, 공부 잘한다고 있는 집 학생에게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우리 장학금 운영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개편안에 따르면 장학금이 필요한 학생은 직접 사정을 증명할 서류를 마련해 학교에 신청해야 한다. 장학금심사위원회가 서류와 함께 신청자의 현재 상황을 면밀히 파악한다. 이렇게 하면 성적이 그리 높지 않고 가계소득이 그리 낮지 않은, 그런데 부모가 사고를 당해 당장 소득이 없어 학업중단 위기에 처한 학생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고려대 관계자는 “학생마다 다양한 사연이 있는 만큼 정말 필요한 학생을 찾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학과별로 성적이나 소득수준에 따라 등록금 전액, 반액, 35%를 감면해 주는 현행 장학금 체계도 바뀔 전망이다. 성적장학금이 사라진 자리는 ‘프로그램 장학금’이 대신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문과 학생이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 이공계 공부를 하거나 관련 자격증을 따면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고려대 측은 어문계열 학생이 전공 언어권으로 단기연수를 갈 수 있도록 비용을 전액 지원하는 방안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세환 강창욱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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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0-13 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