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손수호] SNS, 소통과 소외의 기로에서

입력 2015-10-13 00:20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책은 통찰력으로 번득인다. 1970년대 저술에서 이미 정보과잉이 가져올 부작용을 염려하면서 누락된 정보를 메우는 맥락짓기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메시지에 담긴 맥락이 커뮤니케이션을 지배한다는 논리다. 이때 맥락은 노출된 언어가 아닌 숨겨진 문화, 즉 시간과 공간에 의해 좌우된다고 파악했다.

홀이 이 문제를 고민하던 때와 지금의 상황은 사뭇 다르다. 송수신자의 지위가 쌍방향으로 변한 것은 물론 정보의 양과 플랫폼이 엄청나게 늘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생겨나면서 커뮤니티 또한 역대 최강·최대의 결사체를 형성하고 있다. 정보의 형태도 문자 텍스트에서 이미지, 소리와영상, 카툰과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는 정보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가. 아닌 것 같다. SNS는 소통보다 인간을 소외시키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문화가 생략된 가운데 이뤄지는 언어의 단독비행은 늘 위험하다. 두 개의 케이스만 추려보자. 30명 정도가 가입한 카톡방은 활기가 넘친다. 내용은 건강정보부터 시사현안, 친구가 올린 넋두리까지 다양하다. 어느 날, 친구가 청첩장을 올렸고, 총무가 같이 갈 하객을 모으는데, 한 명이 “나는 안 간다”는 글을 올렸다. 분위기가 갑자기 썰렁해졌다. “같이 가지 그러냐”는 댓글이 달리니 그는 혼주와의 구원(舊怨)을 에둘러 이야기했다. 교통신호가 없는 네거리의 충돌사고다. 부고도 마찬가지다. 계좌번호까지 전달되니 애도마저 강제된다. 집단이 개인을 압도하는 형국이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18명 정도가 멤버로 있는 밴드는 대체로 SNS에 무관심한 친구들이다. 눈팅만 할 뿐 반응이 더디다. 정말 재미난 글을 보면 ‘ㅋㅋ’ 정도에 그친다. 자주 글을 올리던 친구도 지쳤는지, 어느 순간 콘텐츠 공급을 끊었다. 적막강산! 밴드의 침묵은 서로에 대한 무관심의 증표로 읽힌다. 오프라인 모임에서 만나면 밴드를 하기 전에 비해 더 서먹하다. 누구의 책임도 아닌데 왜 다들 서로에게 미안해할까.

인간관계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따라 변화한다. 위의 경우에서 하나는 너무 뜨거워서, 하나는 너무 차가워서 실패했다. 개인으로 이어지던 관계가 카톡이나 밴드로 통합되면서 소통의 과잉 혹은 단절의 문제가 생긴다. 수십년간 연락을 않고 지내던 동창이 카톡방으로 연결된다 해도 교유의 깊이가 다르니 동기일지언정 친구는 될 수 없다. 객쩍은 상갓집에서 만나면 친구와 동기의 간격을 메우느라 분주히 술을 마신다. 집단화·획일화하는 관계망의 우울한 그림자다.

SNS가 소외를 가중시키는 것은 맥락읽기에 취약한 미디어의 속성 때문이다. 귓속말과 고함이 병렬로 놓이다보면 아무리 이모티콘을 달아도 화자의 감정까지 전달하기는 어렵다. 요즘 뜨는 영화 ‘인턴’에도 SNS를 능사로 아는 젊은 커플의 미스커뮤니케이션이 나온다. 경륜 있는 주인공 벤의 충고대로 경우에 따라 전화 목소리를 듣거나 직접 표정을 살피거나, 때로는 진정을 담은 얼굴로 대화해야 한다. 영화는 SNS 편리에 젖어 다른 수단을 잊어버리는 똑똑한 멍청이들의 문제를 꼬집고 있다.

이제 돌아볼 때가 됐다. 메시지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상처받는 일이 많아졌다. 실시간 대화를 한다고 해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자제력과 균형감이다. 글을 올릴 때 한번 돌아보자. 콘텐츠 의미가 무엇인지, 멤버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인지, 맥락에 따라 오독할 여지는 없는지. 이런 자그만 노력이 정보과잉으로 인한 인간소외를 막는다. 손과 머리의 연장물(延長物)로 SNS를 만들어놓고 역습을 당해서야 되겠는가.

손수호(인덕대 교수·문화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