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욱조 (8) ‘고목나무’로 최고가수 올랐지만 빚은 점점 쌓여

입력 2015-10-14 00:48
장욱조 목사가 1981년 피아노를 치며 ‘낙엽 위의 바이올린’을 부르는 모습을 한 방송사에서 촬영하고 있다. 이 노래는 ‘금주의 인기가요’라는 프로그램에서 2위까지 올라갔다.

전남 광주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광주MBC 방송국이 불탔고, 방송국의 모든 예능프로그램이 중단됐다. 그해 여름 광주는 숨죽인 분노에 차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같은 계절 부산 해운대 극동호텔 앞 모래사장에서 ‘고인돌’을 불렀다. 여학생, 아가씨들이 내 뒤를 따라왔다. “오빠!” “오빠!” “오빠!” 여성 팬들이 악을 쓰며 나를 불렀다.

그때 나는 ‘남진’과 ‘나훈아’가 된 것 같았다. 그때까지 그들은 나의 우상이었다. ‘목포에서 올라온 촌놈이 고생 끝에 이제 인기가수가 됐구나.’ 여성 팬들의 환호와 아우성이 마치 환영처럼 들렸다. 내가 고목나무라는 노래로 최고의 인기가수가 된 것이다. 나는 그날 아내에게 “여보 그동안 정말 수고했네”라고 말하며 아내를 안아주었다.

그러나 내 인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가왕 조용필이 돌아왔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이름을 알린 그는 대마초 파동으로 4년 동안 활동을 중단했다가 1980년 가을 정규 1집 ‘창밖의 여자’를 들고 나타났다. 이어 부른 ‘한 오백년’이란 노래는 암울한 시대를 탄식하는 한스러움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외 ‘고추잠자리’(81) ‘못찾겠다 꾀꼬리’(82) ‘친구여’(83) ‘여행을 떠나요’(85) ‘허공’(85)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87) ‘서울서울서울’(88) 등으로 가요계를 휩쓸었다. 조용필은 80년대 MBC 10대가수가요제 가수왕 6차례, KBS 가요대상 최고인기가수상을 4차례 수상했다. 다른 가수들은 들러리였다. 나도 다시 1위를 하지 못했다.

나는 81년 오아시스에서 지구레코드 전속 작곡가로 옮겼다. 당시는 두 곳이 지금의 SM과 YG엔터테인먼트와 같은 양대 음반기획사였다. 나는 그때 ‘낙엽 위의 바이올린’이란 노래를 지구레코드 전속기념 음반으로 발표했는데 금주의 인기가요 2위까지 올라갔다. 1위는 조용필이었다. 나는 그때 전속계약금으로 아파트 한 채를 장만했다. 3000만원쯤 됐다.

우리 부부는 80년과 81년 아들 희웅과 딸 지연을 연이어 얻었다. 나는 작곡가로, 가수로, 장욱조와 고인돌의 리더로 바쁜 날을 보냈다. 아내는 두 아이를 돌보느라 힘들어했지만 나는 가정을 돌볼 새가 없었다. 나이트클럽 공연은 대개 오후 7시에 시작돼 다음날 새벽 4시쯤 끝났다. 당시 그룹사운드들은 장비 경쟁을 많이 했다.

나이트에서 음악 소리가 크고 음질이 좋아야 손님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나이트는 하루에 두 팀에 일을 맡겼다. ‘장욱조와 고인돌’은 다른 그룹과 번갈아 한 호텔 나이트에서 공연했다. 우리 팀의 음향이 다른 팀보다 떨어지면 우리는 그 나이트에서 오랫동안 일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공연료는 3개월에서 6개월짜리 어음으로 받았다.

현금이 없으면 이 어음을 미리 팔아야 했다. 리더는 팀원들 급여, 장비 구입, 공연 무대 섭외까지 했다. 나는 공연료를 6분의 1로 나눠 팀원들과 똑같은 돈을 수입으로 가져갔다. “형님이 단 얼마라도 돈을 더 많이 가져가야 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는 팀원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힘들게 그룹사운드 생활을 하는 팀원들에 대한 배려였다.

나는 빚을 얻어 고가의 장비를 샀고, 팀원들의 월급을 챙겨야 했다. 음반 홍보비도 많이 들었다. 빚이 쌓여갔다. 내가 부른 ‘왜 몰랐을까’가 방송심의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당시 심의는 사실상 안전기획부(현재 국가정보원)에서 하는 것이었다. 내가 가성을 써 여성 목소리를 낸 것이 미풍양속을 헤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은폐된 5·18 민주화운동을 풍자하는 노래란 얘기도 돌았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