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이 내리는 지난 9일 오후 7시쯤 서울지하철 9호선 신논현역 일대로 대리운전 기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저마다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지하철 역사, 골목길, 근처 편의점 안으로 스며들었다.
5년째 대리운전 기사로 일하고 있다는 김모(46)씨는 찬바람에 점퍼를 여미면서 골목길을 서성였다. 그는 “택시는 강남역에서 손님 태우면 3000원씩 준다던데, 우리 같은 대리운전 기사들은 바람 피할 곳조차 없다”고 했다. 서울시는 이달 말부터 금요일 오후 11시부터 3시간 동안 신논현역∼강남역 구간에서 승객을 태우면 택시 기사에게 3000원을 지원한다.
강남역 일대는 밤늦게 귀가하는 사람들이 많아 택시는 물론 대리운전 기사가 손님을 찾아 몰려드는 곳이다. 이 때문에 대리운전 기사들은 신논현역과 강남역, 양재역 등 강남대로를 따라서 삼삼오오 집결한다. 오후 9시쯤에야 첫 호출을 받은 김씨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는 “호출을 받지 못하면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대리 손님을 데려다주고 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더 오래 호출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일이 우리의 주요 일과”라고 답했다.
운수 좋은 날이 아니고선 주택가에서 손님을 만나긴 힘들다. 허탕 치지 않으려면 손님을 찾아 이동해야 한다. 버스도 지하철도 다니지 않는 시간엔 2000∼3000원을 내고 사설 버스를 탄다. 대리운전 기사를 위해 사설 버스 노선을 안내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도 있다. 사설 버스도 다니지 않는 한적한 곳에선 걸어야 한다. 그렇게 유흥가 주변에 도착하면 다시 기다리는 일을 반복한다.
대리운전 기사들은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2시 사이에 3, 4번 대리운전을 한다고 한다. 오전 3시 이후에는 호출이 거의 없다. 이때부터 대중교통이 운행을 시작하는 시간까지 또 지루한 기다림이 시작된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설치된 건물이나 편의점을 찾아 추위를 피할 수밖에 없다. 주택가에선 들어가 기다릴 곳조차 마땅치 않다.
길 위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건 퀵서비스 기사도 마찬가지다. 낮과 밤이라는 시간, 강남과 종로라는 장소만 다를 뿐이다. 퀵서비스 기사들은 낮 시간대에 대기업과 관공서 등 오피스빌딩이 밀집된 종로·중구 일대에서 호출을 기다린다. 3년째 퀵서비스 일을 하는 오모(37)씨는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1000원짜리 커피를 마시거나 청계천변 벤치에 앉아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오씨는 “여름이면 모기에 물리고, 겨울이면 추위와 싸운다”며 “요즘 경기가 어려워 퀵서비스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대기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거리의 노동자’가 처한 노동환경은 열악하다. 서울노동권익센터가 대리운전 기사 3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야간 노동 때문에 37.9%가 우울증세를 보였다. 63.7%는 수면장애를 겪는다고 했다. 72.2%는 잦은 도보 이동 때문에 근골격계에 이상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퀵서비스 기사도 비슷한 상황이다. 232명에게 물었더니 대부분이 질병을 앓고 있지만 33.3%만 치료를 한다고 했다. 치료를 받지 않는 이유로 ‘경제적 부담’(52.5%)을 첫손에 꼽았다. 56.3%는 최근 3년간 교통사고 경험이 있다고 했다.
벌이도 시원찮다. 서울노동권익센터에 따르면 대리운전 기사의 월평균 수입은 236만9000원, 퀵서비스 기사는 212만원이다. 중개업체가 여기서 20∼30%를 떼어간다. 교통·보험·통신요금은 기사 개인 부담이다. 이를 모두 제하고 나면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각각 156만9000원과 155만원에 불과하다.
그나마 ‘거리의 노동자’를 위한 쉼터가 만들어진다. 서울시는 지난 4월 대리운전 기사 등 이동노동자가 이용할 수 있는 ‘24시간 쉼터’를 연내에 시범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
[기획] ‘호출’ 끝없는 기다림… 열악한 ‘길위의 날들’
입력 2015-10-12 02:31 수정 2015-10-12 1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