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도 생활인이다. 의식주를 해결하고 아이 양육과 질병, 사망의 문제와 씨름해야 한다. 낯선 한국 땅에서 그들은 과연 무엇을 먹었을까. 스크랜턴 대부인은 고백했다. “선교사란 세상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므로 ‘무엇을 먹을까’를 걱정해서는 안 되겠지만, 첫 여름을 지내면서 선교사들은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에서 닭내가 났다
쇠고기는 쉽게 썩고 일본에서 수입한 밀가루는 장마철이라 운반 과정에 곰팡이가 피었다. 그나마 닭과 달걀이 있어서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리 두 달을 먹고 나니 입에서 닭 냄새가 났다. 양귀(洋鬼)가 아니라 ‘계귀’(鷄鬼)가 된 셈이었다.
겨울에는 김치 외에 먹을 채소가 없었다. 1886년 봄 알렌과 헤론, 언더우드 사이에 논쟁이 격화된 이유 중 하나는 채소 섭취 부족 때문이었다고 호턴 의사(언더우드 부인)는 분석했다. 첫해 겨울에 채소를 먹지 못해 비타민 C와 엽산, 미네랄이 부족해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논쟁한 이유는 안씨(安氏 알렌)나 원씨(元氏 언더우드)나 혜씨(惠氏 헤론) 때문이 아니라 ‘비타민 C’ 때문이었다.
젊은 선교사들은 결혼 직후 한국에 파송됐다. 도착 후 곧 아이들이 태어났다. 짐승의 젖(소나 염소 우유)을 유아에게 먹이는 서양인을 한국인들은 야만시했다. 선교사들의 고민은 당장 우유를 구하는 것이었다. 송아지를 낳은 암소를 사서 우유를 짜는 것은 쉽지 않았고 안전하지도 않았다. 암소가 죽기도 했다. 수입한 가루우유도 신통치 않았다.
해결책은 유모였다. 분주한 선교사 부인을 위해 유모가 아이를 키웠다. 그래서 선교사 자녀들은 유모의 젖을 먹으면서 유모의 아이들과 함께 자라고 어울리면서 한국어를 빨리 배워 ‘반한국인’이 되었다. 헤론의 두 딸도 유모가 키웠기에 미국 대학을 나온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 최초의 2세 선교사가 되었다.
선교사들이 지방 여행을 나가기 시작하면서 사냥총으로 오리 기러기 꿩 등을 잡아 요리했다. 들판의 새들이 선교사의 단백질 보충을 위해 ‘희생조’가 되었다. 헤론은 지방에 가거나 사냥을 하지 않았다. 대신 왕이 하사한 꿩은 먹었다.
어떤 병을 조심할까
1888년 여름 영아소동이 진정된 후 제중원 환자 수는 잠시 줄었지만, 헤론은 왕실과 외국인, 양반들 진료로 바빴다. 가을에 천연두가 유행했는데 이화학당 교사 로드와일러 양이 감염돼 헤론은 각별히 신경을 썼다. 미국에서 예방주사를 맞고 왔지만 항체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듬해에는 내한한 지 몇 달 후 서울에서 부산까지 전도여행을 하던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8월에 천연두로 사망하는 비극도 발생했다.
선교사를 위협한 병은 비위생적 환경에서 감염되는 이질 말라리아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등이었다. 아이들과 의사들도 이 병으로 죽었다. 1890년 헤론에 이어, 평양의 홀 의사도 1894년 11월 이질에 걸려 요절하고 양화진에 매장됐다.
1888년 가을 헤론은 귓병에 걸린 고종을 치료하기 위해 매일 궁궐에 갔다. 종기가 난 왕자를 치료할 때 명성황후는 헤론 부인을 불러 대화하고 장신구를 하사했다(이후 받은 옷감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왕비의 사촌이자 고위직의 민 씨가 피부병에 걸려 입궐할 수 없었는데, 헤론에게 열흘 간 치료를 받고 나아 왕을 알현할 수 있게 되자 5만 냥(40달러)에 달하는 관모와 망건을 선물했다. 이어 왕진을 요청하는 양반이 늘어났다. 미국 선교사에 대한 정부나 왕실의 태도가 호의적이고, 기독교를 반대하던 양반층에도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었다.
선교사 봉급은 많았을까
당시 선교사들은 대 주택에 살면서 하인들을 부리고, 고액 연봉으로 여유롭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888년 미국 경제 불황으로 선교부가 월급 인하를 타진하는 편지를 각 선교사에게 보냈을 때, 헤론과 언더우드는 봉급으로 서울 생활이 빠듯하다고 보고했다. 연봉 1500달러(2인 가족)는 미국에서 목회자들이 받는 초봉보다 많은 돈이었다. 그러나 청교도처럼 검소하게 살던 서울의 선교사들에게 첫 문제는 환율 변동과 한국 동전의 가치 하락이었다. 종이 화폐가 없어 한 수레의 동전을 싣고 가야 한국 물건을 구매할 수 있었다.
또 서울에서는 생활용품을 수입해야 했다. 겨울 난방용 석탄 1t은 나가사키에서 3달러인데 서울에서는 10달러, 석유는 10갤런(37.8ℓ)에 4.30달러(나가사키 2.25달러)였다. 상하이에서 주문한 아이 신발 한 개에 6.75달러가 나와 반송해야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200달러 상당의 물품(옷이나 가구)을 주문하면, 요코하마에서 나가사키-부산-제물포-서울까지 관세와 하역비, 운반비로 50달러 이상이 들었다. 최소한 세관비와 운반비로 1년에 300달러의 추가 비용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따라서 요코하마에서 1000달러 연봉으로 사는 게 더 여유 있었다. 서울 생활비는 두 배로 들었다. 그럼에도 헤론이나 언더우드는 선교부 재정을 고려해 200달러는 삭감해도 견딜 수 있다고 제안했다.
선교사에게는 손님이 많았다. 새로 파송된 선교사가 오면 정착 때까지 숙식을 제공했다. 외국인집을 지키고 감시하는 포도청의 기수(旗手) 요리사 심부름꾼 유모 식모가 하인으로 있었지만, 종이라기보다는 직업을 주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천주교의 프랑스 신부나 성공회의 영국 신부들은 독신으로 선교사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러나 미국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은 생활인으로 한국인과 어울리면서 살았다. 비용은 더 많이 들었지만 사치를 하거나 호화롭게 살지 않았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우표 한 장도 아끼며 십일조를 했다.
그러면서 낯선 땅에서 거의 매년 병으로 일찍 죽어가는 동료 선교사나 그 자녀가 생기면 양화진에 묻었고, 그 가족을 위로하고 돌봤다. 따라서 한 선교사가 약간 더 좋은 집에 살면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선교부 입장에서는 효율적인 선교사 관리였다.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옥성득 교수(美 UCLA)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7) 선교사의 일상 - 의식주와 육아·생활비 문제
입력 2015-10-13 0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