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9년 내가 작곡한 ‘고목나무’를 타이틀로 첫 앨범을 냈다. ‘저 산 마루 깊은 밤 산새들도 잠들고∼ 우뚝 선 고목이 달빛 아래 외롭네∼’ 가사는 조규철이 작사했다. 고목나무는 진미령이 75년 ‘아쉬움’으로 데뷔할 때 낸 음반의 뒷면에 내가 녹음해 옴니버스 형식으로 넣기도 했던 곡이다. 요즘 홍보는 인터넷으로 많이 하지만 당시 홍보는 발품을 팔았다.
아내 서경숙은 음반을 들고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박정희 대통령이 숨진 그 가을에도 다방에서는 유행가가 여전히 흘러나왔다. 아내는 역전이나 번화가 다방을 찾아갔다. “장욱조씨가 이번에 낸 음반이에요. 한번 틀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마담’이라 불리는 다방 주인에게 음반을 건넸다. 음반만 건네는 게 아니라 요구르트, 사이다 등 음료수도 건넸다.
각 지역 유선방송국을 찾아갔다. 디제이를 만났다. 여성일 경우엔 스타킹, 남성일 경우엔 양말이나 넥타이 선물을 했다. “제 남편이 낸 음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방 도시를 갈 때마다 전화번호부를 펴놓고 엽서를 썼다. 그 지역 주소로 라디오 방송국에 신청곡을 써보내는 것이다. ‘장욱조와 고인돌의 고목나무 들려주세요.’
낮에는 다방, 방송국 등 큰 건물을 다니고 밤엔 여관에서 신청곡을 썼다. 서울 구로공단의 각 공장도 열심히 다녔다. 공장 수위들이 문전박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 놓고 가요. 나중에 내가 방송실 가져다 줄 테니….” 그러면 아내는 사정했다. “좋은 노래예요. 직접 전해드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럼 경비원들은 소리치기 일쑤였다. “아, 거기 두고 가래도!”
그 경비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시루떡을 이고 공장에 가기도 했다. 내가 호텔 나이트 공연을 마치고 가면 아내는 집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이곳저곳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느라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여보, 나 때문에 당신이 고생이 많아.” 음반 홍보를 하는 동안 아내는 코피를 여러 차례 쏟았다. 결혼을 탐탁지 않아 했던 장인 장모도 나를 위해 애썼다.
동양화가셨던 장인 서한익(91년 작고)은 내게 그림을 여러 점 표구해주셨다. 그러면서 도움 줄 만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라고 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생전에 동네 선술집에서 “우리 아들은 유명한 작곡자”라고 자랑하길 좋아했다. 아버지는 재정 보증을 잘못 섰다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실의에 빠지셨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와 후유증으로 50대 중반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홀로 된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예수님을 영접하고 고향에서 동네 어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다. 자녀들 중에도 객지에 나와 있는 나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셨다.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해. 너의 모든 삶을 주님께 맡기면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주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마다 “80세 되면 예수 믿을 테니 어머니는 나를 위해 기도만 열심히 해주세요” 라며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형님과 누나, 여동생들 모든 가족이 어머니와 함께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나는 신앙생활을 미뤘다. 오직 나는 아내와 함께 노래 홍보에 여념이 없었다. 아내와 장모님의 정성 어린 홍보와 어머니의 기도 덕일까?
내 노래는 80년 초반부터 라디오방송에서 심심찮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해 봄 내 노래는 매주 대중가요를 순위대로 노래를 들려주는 KBS TV 프로그램 ‘가요 톱10’에서 1위를 차지했다. ‘아! 내가 꿈을 이뤘구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7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왜 몰랐을까’란 노래까지 10위권에 진입했다. 그러나 나는 거기까지였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욱조 (7) 어머니 예수 영접 권유에 “여든 살 되면 믿겠다”
입력 2015-10-13 0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