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후배 서경숙은 5남매 중 셋째였다. 부모의 반대로 매우 힘들었다. 그녀는 나와 결혼해도 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다 한 장면을 보고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경숙과 나, 나의 한 남자 선배 셋이 서울 중구 스카라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을 때다. 영화가 다 끝나기 전에 내가 일어섰다. 나는 그때 “녹음실 가서 마쳐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경숙은 ‘저 남자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구나. 책임감 있네. 믿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단다. 경숙의 언니도 그녀에게 힘이 됐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꼭 결혼해라. 그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과 결혼해라. 부모님이 너 대신 네 인생을 사는 거 아니다.”
하지만 경숙의 부모님은 “가진 것도 없고, 배움도 없는 남자 만나 무슨 고생하려고 그러느냐”며 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이 마음을 돌리지 않자 경숙의 부모님은 마지못해 결혼을 허락하셨다. 우리 집은 결혼 문제를 나의 의사에 맡겼다. 결국 우리는 1978년 10월 31일 서울 중구 충무로 세종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가수 김세환의 아버지이자 연극배우인 김동원 선생이 해주셨다. 사는 형편이 좋지 않았던 나는 처가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사위였다. 내가 그런 남자라는 게 아내에게 미안했다.
작곡가로서 이름이 알려졌지만 처가가 원하는 부, 명예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장인 장모의 말대로 ‘가진 것도 없고, 배움도 없는 남자’에 불과했다. 나는 상경한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남영동 후암동 등의 셋집을 전전하는 처지였다. 결혼 후 갈 곳이 없었다. 옛말에 ‘겉보리 서 말이면 처가살이는 안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 부부는 장인 소유의 서울 서대문구 문화촌 집으로 들어갔다.
70년대 중후반 나는 ‘사랑과평화’의 리더이자 드러머인 고(故) 김명곤과 친하게 지냈다. 당시는 그룹사운드 결성이 유행이었다. 사랑과평화는 이장희의 도움으로 1집 ‘한동안 뜸했었지’를 발표, 히트시켰다. 최고가의 악기와 24채널 레코딩 기술로 시대를 앞서 갔다. 77년 어느 날 김명곤이 내게 말했다. “형님도 그룹사운드 한번 결성해봐요.” 난 주춤했다.
나는 가수가 되려다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난 안돼. 난 이제 30대야. 너무 늦었어.” 처음엔 이렇게 대답했지만 마음이 조금씩 바뀌었다. ‘꿈을 이루기에 늦은 나이는 없는 거야. 난 가수가 되길 늘 꿈꿔왔잖아.’ 나는 작곡자로서 얻은 자신감을 발판 삼아 그룹 결성을 준비했다. 함께할 다른 멤버를 찾으러 다녔다. 서울 무교동 클럽에서 연주하는 5인조 팀을 찾았다.
당시 아내와 교제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부터 아내는 내 뒷바라지를 했다. 시장에서 옷감을 사와 멤버들의 옷을 손수 지었다. 팀 이름은 ‘장욱조와 고인돌’로 정했다. 아내와 제주도로 여행 갔을 때 본 박물관의 고인돌 이미지가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고인돌을 이름으로 정했던 것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고인돌이 무엇인가. 지석묘라 불리는 청동기시대의 무덤 양식이다. 시신을 안치한 뒤 지상 4면을 돌로 막은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었다. 영혼이 죽어 있었다. 팀을 결성하고 여러 호텔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다. 밤마다 여러 호텔을 전전했다. 가든호텔, 백남(현 프레지던트호텔), 영동, 풍전…. 주로 팝송을 불렀다.
우리 팀이 가수로 이름을 널리 알린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출연료가 많지 않았다. 멤버들이 나에게 제안했다. “형님, 우리 방송에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반을 내고 노래를 불러 히트를 해야 여기저기에서 불러주고 출연료도 팍팍 올라가지요.” 나는 드디어 내가 대중가수로서 꿈을 이룰 때가 온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역경의 열매] 장욱조 (6) 유행하던 그룹사운드에 합류 밤마다 호텔서 노래
입력 2015-10-12 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