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의 기억이다. 재난 현장을 보도하는 TV 기자의 말에 깜짝 놀랐다. “지금 제 뒤로 사망자분의 사체가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상태로….” 화면을 다시 봤다. ‘사망자분’이라고!
비규범적 높임말이 범람하고 있다. ‘음료 나오셨습니다’ ‘2000원이십니다’ 따위의 비문법 간접높임은 일상어가 됐고 이제는 존칭 접미사 ‘∼분’에다 물건에 인격을 입힌 ‘사물존칭’까지 예사다. ‘손님분’ ‘팬분’ ‘고객분’ ‘시청자분’ 정도는 귀에 익었다.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가리켜 ‘아내분’이라고 한다. 수상 소감을 말하는 나이 든 연예인은 ‘성원해준 가족분들께 감사한다’며 눈물을 쏟는다. ‘자식분’이라고도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앞의 명사에 ‘높임’의 뜻을 더하는 ‘∼분’이 무차별적으로 쓰이고 있다. 국립국어원은 누리집에서 ‘∼분’이 사람을 나타내는 모든 명사 뒤에 붙는 것은 아니라며 반드시 가려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은 사물도 사람이다. 옷을 살 때는 ‘다른 옷’ 대신 예사로 ‘다른 아이’ 달라고 한다. 과일을 고를 때는 ‘싱싱한 애들’을 찾는다. 유명 요리사는 TV에서 식재료를 ‘얘네들’이라고 부른다. 가장 많이 들리는 곳은 TV 홈쇼핑에서다. 그곳에서는 모든 상품이 ‘이 아이’ ‘저 아이’ ‘얘’ ‘쟤’다.
말은 화자의 특성을 나타내고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인식의 결과물인 셈이다. 지나친 공대, 겸양, 존대는 진정성의 결여다. 모든 사람에게 ‘∼분’을 갖다대고, 어떤 물건이라도 사람인 양 다룬다는 것은 오히려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중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관심과 배려가 갈수록 옅어지는 현실의 역설적 반영이다. 경쟁, 불신, 불안의 시대에 마치 스스로를 지켜보려는 절박한 방어적 심리를 드러내는 것 같다. 심각한 것은 엉터리 높임말의 오염원이 지상파 방송이란 점이다. 오늘은 한글날. 우리말의 퇴행이 걱정스럽다.
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
[한마당-정진영] 엉터리 높임말 세태
입력 2015-10-09 0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