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로봇’ 규제, 로비에 막혀 좌절되나

입력 2015-10-08 02:46
로봇 스스로 판단해 사람을 죽이는 이른바 ‘킬러 로봇’에 대한 규제 법안이 미국 영국 등의 방해로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목표물을 인공지능으로 추적해 공격할 수 있는 미국의 팔랑크스 비행체 격추 시스템, 영국의 인공지능 무인 스텔스기 타라니스, 자동 발사 기능을 갖춘 이스라엘 국경지대의 로봇 초소 및 인공지능 미사일 방어시스템 아이언돔(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가디언·데일리메일

지난 3일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이 ‘국경없는의사회(MSF)’ 병원을 공습해 22명이 숨진 뒤 전쟁범죄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인공지능으로 운항하는 무인기가 자동사격 시스템에 따라 공습을 했다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까. 현행 국제법상으로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게 휴먼라이트와치 등 국제인권단체들의 지적이다.

때문에 국제사회는 올해 초부터 유엔에서 인공지능으로 공격이 이뤄지는 무기(일명 킬러 로봇)를 금지하는 국제법을 만드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해 왔다. 그런데 최근 미국과 영국의 방해로 법안 제정이 마냥 늦어지고 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과 데일리메일 등이 6일(현지시간) 폭로했다. 가디언은 특히 “요즘 뉴욕 유엔본부에서는 법안 제정을 막으려는 로비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유엔과 외신들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 역시 킬러 로봇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법안 제정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핵심 조항인 규제 대상을 놓고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중국 등 다른 나라들은 ‘기존 및 향후 배치될’ 킬러 로봇을 규제 대상으로 삼자고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과 영국은 기존에 배치된 로봇은 제외하고 법안 제정 이후 만들어질 킬러 로봇에 국한하자고 버티고 있다.

국제시민단체 ‘로봇무기 규제위원회’ 설립자인 노엘 샤키 영국 셰필드대 교수는 “미·영이 반대하는 까닭은 미국의 인공지능 비행체 격추시스템인 팔랑크스(Phalanx)나 이스라엘의 인공지능 미사일 요격 시스템인 아이언돔(Iron Dome) 등 이미 자신들이 실전에 배치한 무기들에 제한이 가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영국은 자동으로 목표물을 감지하고 또 스스로 적인지 여부를 판단해 사격하는 인공지능 스텔스기인 타라니스(Taranis)를 실전배치한 상태다. 가디언과 데일리메일은 우리나라 비무장지대(DMZ)에 배치된 지능형 감시·경계·공격시스템 SGR-1 역시 ‘인간의 판단’이 배제된 킬러 로봇으로 발전할 무기로 꼽기도 했다.

미 버클리대 스튜어트 러셀 교수는 “인공지능은 화약과 핵무기에 이어 제3의 무기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며 “선제적으로 규제하지 않을 경우 핵처럼 한 번 배치된 것을 다시 주워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단체들과 전문가들이 반발하고 있지만 합의가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크리스토프 헤인스 유엔 특별조사관은 “각국 및 무기회사들이 앞다퉈 로봇 무기에 투자하고 있고 또 본전을 뽑으려고 할 것”이라며 “일부의 방해로 법안 제정이 몇 년 더 미뤄지면 이미 엄청난 인공지능 무기들이 실전배치된 뒤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휴먼라이트와치의 보니 도체르티 선임연구원 역시 “킬러 로봇 규제 법안이 없으면 로봇 범죄가 횡행하게 될 것”이라며 “게다가 범죄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나 국제사회의 비난도 사라지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손병호 기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