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욱조 (5) 여자친구의 부친 “‘딴따라’와는 결혼 안된다”

입력 2015-10-09 00:42
장욱조 목사가 어느 해 여름 태진아(오른쪽)와 물놀이 갔을 때의 모습이다. 장 목사는 태진아를 비롯해 조용필 이미자 윤시내 주현미 박정식 하춘화 등 수많은 가수를 위해 1000곡이 넘는 노래를 작곡했다.

내가 당시 속했던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를 부른 가수 장미화가 있었다. 장미화의 소개로 가수 조경수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 ‘아니야’란 곡을 만들어줬다. 조경수가 부른 ‘아니야’는 대히트를 쳤다. 이어 ‘돌려줄 수 없나요?’를 작곡해줬다. 조경수는 이 노래로 1978∼79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무대에 섰다.

그 당시 MBC가 매년 12월 31일 방송하는 10대 가수 가요제는 가수들에게 아주 큰 행사였다. 이 프로그램에 누가 출연하고, 또 누가 1등인 가수왕이 되는지가 큰 관심사였다. 나는 작곡자로서 인기에 힘입어 진미령 정윤선과 같은 유명 여가수에게 노래 레슨을 했다. 진미령에게 줬던 곡 ‘아쉬움’이 후일 김미성이 리메이크를 해 히트를 쳤고 ‘먼훗날’로 또다시 큰 인기를 누렸다.

내가 작곡한 노래는 수많은 대중가수들이 불렀다. 조용필이 노래한 ‘상처’, 유미리가 부른 ‘젊음의 노트’, 최진희의 ‘꼬마인형’, 태진아의 ‘두 여인’, 박정식의 ‘천년바위’, 이미자가 부른 ‘내 영혼 노래가 되어’, 하춘화의 ‘그 누가 당신을’, 주현미가 노래한 ‘뜻밖의 이별’, 윤시내의 ‘하얀 밤’…. 이외에도 발표한 곡들이 1000곡이 넘는다.

하지만 하나님을 몰랐으므로 내 삶의 가치는 ‘인기’와 ‘부’였던 것 같다. 아내를 만난 건 내가 작곡가로 이름을 어느 정도 알린 74년 여름 무렵이다. 고교 선배가 종로1가 한 건물 2층의 종다방으로 나를 불렀다. 그 선배는 나를 아내와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서경숙. 너보다 일곱 살 아래 고향 동생이네.”

그 선배는 나를 작곡가라고 소개했다. 경숙은 그때 조흥은행 전산실에서 근무하는 회사원이었다. 현모양처의 이미지였다. 예뻤다. 주변에서는 영화배우 최은희와 유지인을 닮았다는 칭찬을 듣는 수준이었다. 나는 경숙에게 호감이 갔지만 적극적으로 구애하지는 않았다. 제자들도 있고, 여자 친구도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동향 사람으로 가끔 만났을 뿐이었다.

경숙은 당시 대중가요 작곡자를 만난다는 호기심이 컸다고 한다. 연예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유명한 가수 ‘아니야’를 부른 조경수 등이 있었다. 경숙이는 나오라고 할 때마다 혼자 나오지 않고 자기와 친한 선배 언니와 함께 왔다. 아마 혼자 연예인을 만나는 게 부담이 됐던 것 같다.

주변 친구들도 하나 둘 결혼을 했다. 내 나이가 어느덧 서른에 가까워가고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사랑과평화의 리더 김명곤, 가수 조경수 한동일 등이 나를 부추겼다. “경숙이 놓치지 말고 꼭 결혼하세요. 착하고 예쁘고 똑똑하고….” 프러포즈를 마음먹었다. 장소는 77년 명보극장 건너편 지하에 있던 돌다방이었다.

나는 경숙에게 이제 정식으로 교제하길 원한다고 고백했다. 경숙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자리에서 ‘좋다, 싫다’는 말을 바로 하지는 않았지만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경숙은 “부모님께 여쭤볼게요. 허락을 받아야 해요”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남녀가 교제를 하기 전 부모의 허락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교제가 대개 결혼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숙의 부모는 나와의 교제를 반대했다. 경숙의 아버지는 목포에서 라이온스 클럽 총재와 숙박업을 하는 지방 유지셨다. 그 즈음 혼기가 찬 경숙에게는 서울 유명 사립학교재단 이사장, 판검사 등 법조인 집안 등에서 선이 들어왔다. 부친은 경숙에게 “네가 그런 ‘딴따라’와 결혼하는 꼴을 보느니 내가 차라리 죽겠다”고까지 했다. 경숙의 집안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원불교 집안이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