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횡성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산이 둔내면 화동리에 위치한 태기산이다. 휘닉스파크 뒷산 몽블랑정상으로 알려진 곳이다. 산세가 웅장하고, 주변의 산야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이 으뜸이다. 장쾌한 풍광과 함께 가을길의 호젓함도 즐길 수 있다. 높이가 해발 1261m에 이르지만 정상으로 가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양두구미재에서 태기산 쪽으로 군사용 임도가 나 있어 차로 정상 바로 아래까지 오를 수 있다. 다만 길이 험한 비포장도로가 많아 일반 승용차보다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경사가 급해지면 차를 세워놓고 도보로 오르는 것도 좋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능선을 따라 줄지어 선 풍력발전기 20기의 거대한 바람개비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고 있다. 풍력발전기의 모습과 뒤로 보이는 산과 들판의 풍경은 한마디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낮은 구름이 깔려 발아래 산들이 섬처럼 보일 때 특히 아름답다. 특히 풍력발전기를 이고 선 산 전체가 조금씩 단풍으로 물들고 있어 가을색을 만끽할 수 있다.
삼한시대 말기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이 신라군에게 쫓기다 이 곳에서 태기산성을 쌓고 군사를 길러 신라와 싸웠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태기산 자락인 성골 골짜기에는 허물어진 성벽을 비롯해 집터와 샘터가 곳곳에 남아 있다.
횡성에는 ‘빠름’에 밀려 잊힌 옛길이 있다. ‘옛 42번 국도’다. 횡성읍에서 42번 국도를 따라가다 안흥에서 평창 방림으로 가는 길에 문재라는 고개가 있다. 지금은 1995년 뚫린 터널로 길이 직선화됐지만 예전에 이 고개를 넘어가려면 사자산 끝자락에서부터 시작되는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를 지나가야 했다. 지금은 임도에 불과하지만 100여년 전만 하더라도 관동지방과 한양을 이어주던 ‘대로’였다.
‘세종실록지리지’ 등 옛 문헌은 이 길의 원형을 ‘관동대로’라고 적었다. 관동대로는 경북 울진 평해를 출발해 삼척·강릉을 지나 대관령을 넘어 횡성을 거쳐 서울의 흥인지문(동대문)에 이르는 천릿길. 나라에서 행정용으로 관리하던 길이기도 했지만 선비와 보부상 등이 넘나들던 숱한 사연을 안고 있는 길이었다.
이 길은 조선 초기만 해도 사람 한둘이 간신히 지나다닐 정도였으나 조선 중종 때 강원관찰사인 고형산이 사재를 털어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혔다고 한다. 정상부까지 대략 5㎞다. 천천히 차를 몰고 올라도 좋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가면 더할 나위 없다. 물론 걸어서 가는 것이 가장 좋다. 산림청에서 조성한 ‘명품 숲’ 길도 있다.
횡성호는 남한강 제1 지류인 섬강의 물줄기를 막은 횡성댐(2000년 11월 준공)으로 인해 만들어진 인공호수다. 총 저수량 8690만t, 유역면적 209㎢인 횡성호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횡성호수길은 2011년 가을에 개통됐다.
호수길은 모두 6개 구간으로, 총 길이는 27㎞에 달한다. 가장 짧은 3구간은 1.5㎞로 1시간 정도가 걸리고, 가장 긴 4구간과 6구간은 각각 7㎞로 2시간30분 정도 소요된다. 6개 구간 중 호수를 가장 가까이서 걸을 수 있는 5구간(4.5㎞ 2시간 소요)은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회귀코스라 인기가 높다. 다만 최근 가뭄으로 호수 수위가 낮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
5구간 출발점인 망향의동산은 댐이 들어서면서 물에 잠긴 갑천면 구방리·중금리·화천리·부동리·포동리 수몰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 야트막한 동산에는 옛 흔적을 볼 수 있는 전시관과 중금리 탑둔지에 있던 삼층석탑, 망향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려시대 9세기 말쯤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은 신라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반듯하고 단아하다.
횡성호수길에도 태기왕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신라에 쫓기던 태기왕이 갑천으로 온 뒤 갑옷을 씻었다고 전해진다.
둔내면 삽교리 청태산(해발 1200m) 자락에 자리잡은 숲체원은 풍광이 맑다. 해발 850m의 청정림 사이에서 바라보는 숲은 공기가 다르고 햇빛도 다르다. 이곳에서는 산을 오르는 길도 색다르다. 정상까지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의 데크로드 덕분에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 해발 920m의 전망대까지 이어지는 1㎞ 길이의 ‘편안한 등산로’는 휠체어나 유모차로도 걸을 수 있는 곳이다. 사람의 손이 간 구조물이지만 자연의 일부처럼 거슬림이 덜하다.
숲에 파묻히면 조용하고 아늑하다. 숲 입구엔 붉은 열매가 탐스러운 회나무가 반긴다.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아 원시림 그대로 보존돼 있고, 짙은 숲 사이로 시원하게 부는 초록 바람은 막힌 가슴을 뚫어줄 만큼 깊은 청량감을 선사한다. 나무에선 피톤치드가 넘쳐나고, 계류와 폭포에서 나온 음이온이 온몸을 휘감는 ‘치유의 숲’이다. 열매를 품은 나무마다 다람쥐와 청설모가 겨울준비에 분주하다. 깊어가는 가을을 느끼고 싶다면 이곳만 한 곳도 흔치 않다.
횡성은 한우의 고장이다. 횡성한우는 그 맛만큼이나 품질관리가 까다롭기로 유명해 도축하기 전 일정 기간 지역에서 사육되면 브랜드를 부여하는 다른 곳과 달리 횡성축협에서 공급한 수정란으로 태어나고 관내에서 자라야만 횡성한우로 인증해준다.
지난 7일부터 오는 11일까지 섬강둔치 일원에서 ‘맛보소, 즐기소, 쉬어가소’를 주제로 횡성한우축제가 열리고 있다. 축제기간에 횡성군과 횡성축협이 품질을 보증하는 쇠고기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한우고기 셀프식당, 한우고기 시식회 등 다양한 행사도 마련돼 있다.
횡성=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