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욱조 목사 (4) 하나님 주신 ‘작곡 달란트’ 살리니 잘나가기 시작

입력 2015-10-08 00:05
친구 김상만과 장욱조 목사(오른쪽)가 개나리가 만발한 남산공원으로 놀러 갔을 때의 모습이다. 장 목사는 여성 듀오 비퀸즈 ‘속삭여주세요’ 작곡으로 데뷔했다.

당시 한 학기 대학 등록금은 3만∼5만원 사이였다. 소 한 마리 가격은 4만원 전후였다. 소 한 마리를 팔아 한 학기 등록금을 내 우골탑(牛骨塔)이란 말이 나온 시절이다. 그 돈이면 처녀가 시집갈 때 웬만한 혼수를 준비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돈을 건네고 노심초사 가수협회증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친구는 기타학원 주변에서 종적을 감췄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내가 어떻게 마련한 돈인데…. 이 나쁜 자식 잡히기만 해봐라.” 나는 눈물을 머금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나는 세상 물정을 몰랐던 것이다. 협회증 하나로 가수가 되는 줄 알 만큼 순진했다.

친구 최하우의 소개로 경북 선산 출신의 친구 김상만을 만났다. 나랑 죽이 잘 맞았다. 형제처럼 서로 도와주고 배려했다. 나는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상만은 나를 전오승 음악학원 교수이신 작곡가 이성길 선생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성길 선생은 친구 상만의 요청으로 나의 음반 제작을 도와주려 했다.

나는 이 선생에게 녹음비를 지불했다. 그런데 상만이는 나를 말렸다. “가수는 하지 마라. 넌 작곡을 잘하지 않느냐. 왜 가수가 되려고 하느냐. 넌 작곡만으로 충분히 유명해질 수 있어!”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친구의 조언이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 난 노래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선생에게 음반 준비를 그만둔다고 했다.

이 선생은 상만이가 말린 걸 알고 그를 나무랐다. “너는 왜 장욱조 노래를 못하게 하느냐? 자기가 하고 싶다는데….” 결국 나는 이성길 선생 밑에서 사보를 해주며 편곡 기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사보(寫譜)는 노래가 한 곡 있으면 그 노래에 필요한 모든 악기별 악보를 따로 쓰는 것이다. 나는 약 1년 동안 사보를 하면서 편곡 기법과 요령을 배울 수 있었다. 편곡으로 돈을 조금 벌기도 했지만 생활비가 부족했다. 철도청 홍익회 판매원으로 일하던 큰형이 나를 도와줬다. 그러다 작사가 이성길 선생과 짝을 이뤄 처음 작곡 데뷔를 했다. 1969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나온 여성 듀오 비퀸즈 ‘속삭여주세요’란 곡이다.

‘당신을 영원토록 사랑할 내 마음 속삭여주세요’라는 노랫말의 트로트였다. 노래가 꽤 인기를 얻었지만 이 듀오는 가수생활을 하다 결혼한 뒤 활동을 중단했다. 나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을 하게 됐다. 내가 속해 있던 오아시스레코드사는 내게 피아노가 있는 레슨 룸을 하나 내줬다. ‘아 드디어 나도 작곡가로 인정받는구나.’

그때부터 기성 가수의 편곡과 작곡도 할 기회가 생겼다. 을지로 국도극장 앞 건물 맨 위층인 4층엔 초원다방이 있었다. 이 다방에서 작사가 박건호가 준 메모를 받았다. 나는 한쪽 다리로 박자를 맞추고 연필을 든 손으로 박자를 맞췄다. ‘따따다다 따다다∼따따다다 따다다∼.’ 한 시절을 풍미한 1973년 방주연의 ‘기다리게 해놓고’란 노래를 만들었다.

메모를 보고 다방에서 즉석으로 만든 것이다. 작곡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로 여겨진다. 노랫말을 보면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장르, 템포, 선율이 자유자재로 만난다. 블루스, 발라드, 디스코, 민요…. 빠르게 느리게 보통…. 소스가 들어가면 곡이 나온다. 나는 약 6년 동안 생활을 위해 노래 레슨도 하고 작곡 수업도 했다.

친구 상만의 말대로 내가 가장 잘하고, 자신 있는 분야는 작곡이었다. 나는 상만과 콤비를 이루게 됐다. 상만은 작사자, 나는 작곡자로 여러 가지 대중가요를 만들었다. 작곡자로 어느 정도 유명해진 74년, 내 이름을 딴 음악실을 내게 됐다. ‘장욱조 음악실’. 서울 을지로 국도극장 앞에 있었다. 레슨 룸과 내 개인 작업실이 별도로 있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