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석 명절 주간에 비엔나전투 현장을 견학하기 위해 비엔나를 다녀왔다. 콘스탄티노플을 멸망시켰던 메흐메드 2세의 손자인 메흐메드 4세가 그 여세를 몰아서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마저 모스크로 만들겠다며 유럽을 치러간다. 첫 관문이 비엔나였다. 당시로선 비엔나만 점령하면 로마로 바로 진격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서 이전투구에 빠져 있었고 특별히 프랑스는 은근히 비엔나가 무너지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뒤에서 이슬람군에게 원조를 해 주며 비엔나를 치도록 부추긴 것이다.
메흐메드 4세는 총사령관 무스타파를 앞세워 30만 군대를 조직해서 진격한 것이다. 이때 비엔나 군사는 기껏해야 1만5000명이었다. 그러자 황제인 레오폴드 1세는 혼비백산하며 당장 왕궁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시민들도 6만명이나 피난을 가 버렸다. 결국 비엔나 시장 리벤베르크가 군사들과 함께 결사 항전을 하지만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때 폴란드 왕 얀 소비에스키가 7만명의 연합군을 조직해서 비엔나를 구하러 온다. 사실 소비에스키와 레오폴드 1세는 앙숙관계요, 정적이었다. 왜냐하면 레오폴드 1세가 소비에스키를 폐위시키고 로렌 샤를공에게 왕위를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비에스키가 얼마나 감정이 상했겠는가. 그런데 소비에스키는 이렇게 말하며 비엔나를 구하러 왔다. “아무리 레오폴드 1세가 증오스러워도 비엔나가 망하면 폴란드도 망하고 유럽도 없게 될 것이다. 유럽의 교회도 몰락하고 이슬람 천지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면 구교도 없고 신교도 없게 된다. 그러니 나라도 일어나서 비엔나를 지키리라.”
그러나 무스타파는 소비에스키가 온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70대 고령이 되어 말도 제대로 타지 못하고 칼도 못 잡는 노인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그러나 소비에스키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전략을 구사한다. 그는 이슬람 군대의 시선을 피해서 해발 550m나 되는 칼렌버그산 정상으로 대포를 직접 옮긴 것이다. 맨몸으로 올라가는 것도 힘든데 노구였지만 손수 대포를 밀며 정상까지 오른다.
그는 칼렌버그 정상에서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후에 군사들에게 웅변을 하였다. “여러분, 하나님은 비엔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유럽의 교회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연합하여 죽기로 싸우면 유럽을 지키고 기독교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스만튀르크군 30만명이 진치고 있는 본진을 향해서 대포를 비 오듯 퍼부었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무스타파와 30만명의 군사들은 순식간에 혼비백산하며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러자 소비에스키의 연합군들이 비호같이 벌판으로 내려가서 공격하였다. 그 결과 7만명의 군대가 30만명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스만튀르크는 유럽에서 완전히 패권을 잃어버리고 쇠락해 버리고 말았다. 소비에스키는 정말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으면 어찌 유럽의 그 찬란한 교회 건물과 기독교적인 문학 작품, 베토벤 바하 헨델의 음악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나는 칼렌버그 언덕에서 그의 혼과 거친 숨결, 의협심을 느꼈다. 그의 처절한 절규와 영혼의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 현실은 어떠한가. 개교회 교단 교계가 얼마나 다툼과 분열로 아픔을 겪고 있는가.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힘을 낭비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얼마나 집합적 공동체의 스피릿을 갖고 있는가. 이웃 교회의 아픔을 은근히 즐기고 있지는 않는가. 한국교회의 어려운 현실을 나 몰라라 하고 있지 않는가. 소비에스키의 연합정신을 배워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의 거룩한 의협심을 회복해야 할 때이다. 이웃 교회가 힘들면 우리 교회도 힘들다. 한국교회 전체적 어려움은 곧 우리 교회의 어려움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얼마나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세력에 포위당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소비에스키의 혼을 가지고 다시 우리의 칼렌버그 언덕으로 올라가자. 그곳에서 한국교회를 지켜내고 하나님의 진리를 사수하자.
소강석 (새에덴교회목사)
[소강석의 꽃씨 칼럼] 우리의 칼렌버그로 올라가자
입력 2015-10-07 0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