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장욱조 (3) 음악학원 다니던 중 ‘가수협회증’ 발급 유혹에…

입력 2015-10-07 01:13
장욱조 목사는 고교 시절 고슴도치라는 이름의 밴드를 만들었고 마을 노래자랑대회를 열었다. 장 목사(왼쪽 네 번째)는 밴드부 활동을 할 때 항상 기타를 들었다.

마을 노래자랑대회가 끝나면 이장이 잔치를 열어줬다. 닭죽을 끓여 동네 사람들이 다같이 나눠먹었다. 마을 아가씨들에게 인기도 좋았다. 내가 만든 곡 ‘님이여’를 기타를 치며 부르기도 했다. 동창들은 지금도 그때 자작곡을 부르던 내 모습을 얘기한다. 부모님은 내가 음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너 하고 싶은 것 하라”며 격려해주셨다.

나는 가수가 되기 위해 서울로 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살던 마을에 한 형이 있었다.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고 낮에는 학교 가서 공부할 수 있어!” 그 형의 얘기를 듣고 진학할 학교를 알아봤다. 내겐 밴드부가 우선순위였다. 당시 서울 중동고에 밴드부가 있었다. 중동고 야간 과정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쉽지 않아 목포 동광고를 계속 다녔다.

고3 동광고 밴드부를 담당하던 음악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넌 노래 만드는 실력이 출중하다. 작곡과에 진학해라.” 당시 나운영 연세대 음대 교수가 서울역 근처 동자동에 살았다. 나 교수에게 한 차례 레슨을 받았다. 전기에는 연세대, 후기엔 한양대 음대 작곡과에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만약 고3 때 내가 대학에 입학했다면 무엇을 했을까. 아마 고교 음악 교사가 되었을 것이다. 고 1, 2학년 때 여러 음악 콩쿠르에서 ‘오 솔레미오’ 등 이탈리아 민요를 부르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하나님은 내가 성악가의 길로 가는 걸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나는 대학 낙방으로 대중가요 작곡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1967년 서울로 왔다. 이종사촌형이 종로에서 작은 양철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내가 배달한 산업경제신문은 1954년 창간돼 73년 폐간된 일간 경제신문이다. 형의 가게 옆에는 대포집 ‘송씨네’가 있었다. 대포집 주인의 아들은 넷이었다. 그중 초등학생과 중학생 과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고된 시간이었다. 오로지 가수가 되기 위해서였다.

나는 나의 재능을 믿었다. 어머니는 막내이모의 전도로 하나님을 사모했지만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교회 다니는 것들은 조상도 몰라보는 상것”이라며 교회 다니는 이들을 비난했다. 반면 어머니는 제사상을 차릴 때마다 “부모가 살아있을 때 효도해야지 돌아가시고 나서 상 차리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푸념하셨다.

어머니는 한여름 마을회관에 단기선교 오는 대학생들의 기타 소리를 좋아했다. “밭 맬 때 회관에서 찬송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참 좋더구나.” 어머니는 그런 말씀도 하셨다. “우리 동네에 교회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마을엔 교회가 없었다. 어머니는 하나님을 사모했던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잠 8:17)는 말씀이 떠오른다.

나는 기타 학원 주변을 배회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로 시작되는 노래 ‘노래가락 차차차’의 작곡가 김성근의 제자라는 친구를 만나게 됐다. 그는 김성근이 운영하는 기타학원 학원생에 불과했다. 그가 어느 날 나에게 좋은 기회가 있다며 이런 제안을 했다. “자네 가수 되고 싶지? 가수 되려면 가수협회 회원이 되겠나?”

그는 협회증만 있으면 가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신문 배달, 가정교사로 가수 될 날만 꿈꾸던 내게 솔깃한 얘기였다. “어떻게 하면 되는 거요?” 그는 협회증을 만드는 데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액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소 한 마리 값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어렵게 모은 돈을 그에게 내밀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곧 가수가 되는 건가?’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