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deep] 권한은 듬뿍 책임은 ‘쏙’ 소비자 보호는 누가?… ‘보험업 개혁 로드맵’ 기대와 우려

입력 2015-10-06 02:41

“수십년 묵은 체증이 뚫렸다.” “임종룡 위원장이 오래 남아 꼭 실행해 주면 좋겠다.” 금융위원회가 지난 1일 발표한 보험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에 보험업계는 대환영하는 분위기다. 1993년 금융자율화 이후 최대의 변화라고 평가한다. 긴장감도 느껴진다. 그동안 인맥을 통한 판매에 안주하던 관행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30여년 보험업계에 종사한 한 관계자는 “금융위 방안이 실행되면 문 닫는 보험사도 나올 수 있다”며 “구조조정의 진통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소비자 보호대책이 보강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험 지각변동=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직접 발표한 보험개혁방안은 그동안 보험사들이 요구해 왔던 내용을 거의 다 담았다. 발표 다음날 임 위원장과 만난 보험사 최고경영자들은 “설마 이렇게까지 다 수용할 줄은 몰랐다”며 “우리가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라고 말했다.

임종룡표 금융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한 보험개혁방안은 그 정도로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는 보험회사들이 새로운 보험상품을 만들더라도 사실상 금융감독원의 사전 심사를 받아야 했다. 또 보험료와 보험금 결정의 기준이 되는 이자율도 보험 당국에서 정했기 때문에 보험회사 브랜드만 다를 뿐 대동소이한 보험을 팔아왔다. 임 위원장은 “우리나라 보험산업의 특징은 한 가지로 얘기할 수 있다”며 “똑같은 상품을 똑같이 판다”고 비판했다.

결국 판매 채널을 누가 더 확보하느냐는 유통 경쟁을 벌여왔다. 한국 금융산업의 경쟁력이 아프리카 우간다보다 뒤처진다는 세계경제포럼(WEF)의 평가도 이런 상황에 기인했다.

금융위는 사전 인가제도를 폐지하고, 상품개발의 자율성 확대를 막아온 표준약관 제도도 단계적으로 없애고, 표준이율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가입자가 많고 국민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의료실손보험과 자동차보험은 2년 동안의 유예기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자율화할 방침이다.

여기에 자산운용규제도 사전·직접 통제에서 사후·간접 통제로 전환해 외국환 상품이나 파생상품에도 투자할 수 있도록 전면 개편한다는 방침이다. 대신 국제적인 회계기준에 따라 사후 감독을 강화하기로 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저금리 시대에 채권의 수익률에만 의존할 수 없어 고민해 온 보험사에 투자의 폭을 넓혀준 것”이라며 “건전성과 안정성을 감독하는 기준도 국제적인 수준으로 높여 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려 한다”고 설명했다.

보험업계의 또 다른 골칫거리인 법인보험대리점(GA)도 손보겠다는 방침이다. 가입자들을 위해 보험상품을 비교해서 팔도록 허용한 GA가 오히려 가입자들을 오도하고 보험사에는 더 높은 수수료를 요구하는 문제를 정비하겠다는 계획이다. 임 위원장은 “GA를 보험상품 중개업자로 전환해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하겠다”고 못 박았다.

보장이나 보험료에서 다양한 상품을 만들도록 문을 열면 상품개발 능력이 떨어지거나 무리한 수익률을 감당하지 못하는 보험사들은 견디기 어렵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지각변동을 불러올 수 있는 변화”라며 “과거 일본 보험업계 모델을 쫓아왔던 한국이 무한경쟁의 미국 모델로 바뀌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또 다른 보험사 관계자는 “기존의 판매 관행에 안주해 왔던 보험사엔 오히려 위기가 될 수 있다”며 “누가 살아남게 될지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자 보호는 미흡=금융소비자연맹 이기욱 사무처장은 “금융위 구상대로 건전한 경쟁이 이뤄진다면 소비자들에게는 더 유리하지 않겠느냐”면서도 “보험사들이 과연 그만한 신뢰를 받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보험사들은 과거 사상 최대의 수익을 거둘 때도 가입자들에게 돌려주기는커녕 대주주에게 더 많은 배당을 하고 직원들의 성과급 잔치를 벌이는 데 썼다는 것이다.

금융위의 보험개혁방안 중 소비자 보호 부분은 선택권을 넓히는 수준에 그쳤다. 금융위는 국민들이 쉽게 보험을 비교할 수 있도록 온라인 보험슈퍼마켓을 정비해 다음달 안에 문을 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규제완화 문을 열어놓고 사후 책임을 강하게 묻지 않는다면 소비자 피해가 더 커질 수 있고 보험업계도 부실해질 수 있다. 복수의 보험업계 관계자는 “경쟁이 시작되면 단기간에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자율화와 규제완화의 허점을 악용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며 “그런 회사는 문 닫을 정도로 징벌적인 처벌을 내릴 수 있도록 해야 보험업계 스스로 책임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임 위원장과 만난 보험사 사장들도 간담회 뒤 따로 모여 “수십년 만에 찾아온 기회인 만큼 책임감 있게 행동해 시장의 신뢰를 받자”며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금융위 이동훈 보험과장은 “사실 그동안은 사전 규제를 하다 보니 사후에 문제가 생겼다고 강하게 처벌하기 어려웠다”며 “앞으로는 소비자에게 명백한 손실을 끼친 보험사에는 우리가 거액의 소송을 당할 각오를 하고라도 규율을 세워가겠다”고 강조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