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31일 경기도 이천 LG챔피언스파크에서 열린 2015 LG컵 국제여자야구대회 일본과의 결승전. 한 눈에 보기에도 앳돼 보이는 소녀가 마운드에 올랐다. 만 15세 ‘최연소 국가대표’ 김라경 선수(163㎝·59㎏)였다. 대회 중 걸린 감기 몸살로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김라경은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스트라이크 존을 향해 힘차게 공을 뿌렸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시속 112㎞. 여자야구에서 보기 힘든 빠른 공에 관중석에선 환호가 터져 나왔다. 비록 2실점하며 강판됐지만 그의 모습은 경기장에 모인 팬들의 뇌리에 강하게 꽂혔다.
야구선수 오빠를 보며 키운 꿈
김라경은 오빠의 영향을 받아 야구장을 자주 찾았다. 한화 이글스 투수 김병근(22)이 친오빠다. 자연스레 야구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공을 잡은 건 초등학교 4학년 때. 오빠를 따라 연습장에 갔다가 무심코 한 캐치볼이 시작이었다. 한 번도 공을 만져본 적 없던 동생이 의외로 캐치볼에 소질을 보이자 오빠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공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평소 야구에 관심이 많았던 김라경은 그날 이후 ‘나도 야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6학년 때 계룡 리틀야구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올해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달았다.
평균 나이 30.1세인 대표팀에서 가장 어리다. 오로지 야구 생각밖에 없는 소녀에게도 국가대표는 상상도 못했던 영광이었다. 재능은 선동렬 전 KIA 타이거즈 감독 눈에도 띄었다. 선 감독은 재능기부로 대표팀을 방문해 김라경의 투구를 본 뒤 “예쁜 폼을 갖고 있다”는 칭찬과 함께 스파이크를 선물하기도 했다. 대표팀 인스트럭터를 맡았던 양승호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팀의 성인 에이스가 120km를 던진다. 조금 더 가다듬는다면 내년엔 115∼120km 스피드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라경은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구속 100㎞를 돌파했다. 중 3인 지금은 110㎞를 가뿐히 넘는다.
지난해 여자선수 최초로 리틀 야구 월드시리즈 승리를 따내 화제를 모았던 미국의 모네 데이비스와 비슷한 구속이다. 김라경은 지난 3월 여자선수로는 처음으로 장충리틀야구장에서 홈런을 쳤다. ‘괴력 소녀’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꿈은 현재 진행형
강렬한 데뷔전을 치르고 한 달여가 지났다. 여느 중학생처럼 고등학교 입시 준비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김라경이지만 야구 연습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운동복으로 갈이 입고 곧장 야구장으로 향한다. 하루 2시간 반씩 훈련한다. 러닝으로 몸을 풀고 캐치볼, 배팅, 수비 연습을 반복한다. 주위엔 언제나 어린 남자선수들로 가득하다. 6학년 때 들어온 리틀야구단에서 김라경은 어느새 최고참이 됐다. 남자선수들은 중학교 1학년까지 리틀야구선수로 뛸 수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중학교 야구부로 옮겨 가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여자선수에 한 해 중학교 3학년까지 뛸 수 있도록 리틀야구 규정이 바뀌기 전까진 여자선수들도 다를 바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여자선수들은 옮겨갈 팀이 없다는 것. 김라경도 규정 탓에 지난해를 통째로 쉬었다. 다행히 규정이 바뀌면서 올해는 리틀야구단 소속으로 훈련을 계속 할 수 있게 됐다.
한국 프로야구 최초 여자선수라는 꿈도 좀 더 꿀 수 있게 됐다. 요즘엔 커브와 슬라이더 등 변화구를 다듬고 있다. 빠른 직구에 변화구가 가미되면 좀 더 효율적인 피칭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사실 야구선수의 길은 어린 여중생이 감당하기엔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당장 중학교를 졸업하면 야구를 관둬야 할지 모른다. 김라경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가까운 미래에 마운드에 설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김라경은 “‘그때’가 되면 답이 생기지 않을까요?”라는 말을 자주한다. 그때는 내년 부산 기장에서 열리는 제7회 세계여자야구월드컵이다. 소녀의 꿈은 진행 중이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괴력의 야구 소녀 ‘구속 112㎞’… 여중생 ‘최연소 국가대표’ 김라경의 꿈
입력 2015-10-06 0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