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우리 삼남매가 피신한 곳은 전남 무안군 일로면 산정리에 있는 외가였다. 좌익 청년들이 창을 들고 와 아버지 행방을 캐묻고 우리 가족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어머니는 지서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네 남편 장효식이 있는 곳을 대라!” 며칠 감금된 채 고문을 당하면서도 어머니께서는 “나는 모른다”고 버텼다.
공산군 앞잡이들은 “남편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고 어머니를 겁박했다. 어머니는 “죄가 있으면 내가 죽고, 죄가 없으면 내가 산다”고 담담하게 대꾸했다고 한다. 이들은 “아따, 이년 하는 소리 좀 들어보소. 통 크네”라며 혀를 찼다. 그들은 어린 나도 데려갔다. 나를 보면서 “저런 경찰관 새끼는 때려 죽여야 한다”며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렸다.
나는 기절을 했던 모양이다. 치안대원 중 김재수라는 분이 우리 집안과 친했다. 그분이 다른 사람들 몰래 나를 외할머니에게 빼돌려줘 나는 살게 됐다. 어머니는 미국 전투기 B-29가 공중에 나타나 공산군과 좌익분자들이 지하 벙커로 숨은 틈을 타 집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신 것을 생각하면 다윗의 시편이 떠오른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전쟁 후에도 아버지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발령지를 따라 이곳저곳 다니셨다.
아버지는 목포의 대표적 야당 인사인 민주당 후보 김문옥씨와 친척이었다. 김씨는 가수 남진(본명 김남진)의 부친이다. 김씨의 선거 운동을 도왔던 아버지는 인사에서 물을 먹었다. 자유당 정권에 밉보인 거다. 결국 옷을 벗었다. 아버지는 퇴직 후 술로 마음을 달랬다.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어머니와의 다툼도 잦아졌다.
우리 가족이 복음을 듣게 된 것은 막내 이모를 통해서다. 이모는 집에 오실 때 마다 항상 기도하셨다. 막내이모는 아버지에게 자주 “형부,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권유했다. 아버지는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 “왜 구원만 주냐. 100원이나 1000원을 주지”라며 흘려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반대로 교회에 나가지 못했다.
어린 시절, 마을 한 가운데 달린 스피커로 노래가 자주 흘러나왔다. ‘오동추야’ ‘목포의 눈물’ ‘눈물 젖은 두만강’ 등등. 나는 그런 노래를 들으며 초등학교 때부터 가수를 꿈꿨다. 박수도 받고 인기도 얻고 돈도 벌 수 있는 가장 멋진 직업 같았다. 나는 임성초등학교 저학년 때 독학으로 풍금을 쳤다. 학예회 때는 ‘푸른 하늘 은하수’와 같은 노래를 부르거나 연극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전교 조례 때 학교 단상 위에 올라가 지휘를 했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기차로 통학했다. 임성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동목포역을 지나 목포역에서 내렸다. 유달중을 다녔다. 동광고(현 홍일고)에 진학한 뒤 동네 형에게 기타를 배웠다. 고1 때 처음 작곡을 시작했다. 주로 동요였다. 가요를 만든 건 66년 고3때다. 첫 곡은 ‘님이여’였다. ‘가시는/길에/살며시/웃어주오/이별이란/서러운 것’이 가사였다.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 가장 잘 어울리는 선율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진다. 마치 내 머릿속에 음표들이 제각각 돌아다니다 춤추듯 자리를 잡는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에 감사한다. 고등학교 때 밴드부 ‘고슴도치’를 조직했다. 마을 언덕에 올라가 트럼펫을 불었다. 우리 밴드는 마을에서 노래자랑 대회를 주최했다. 1등상은 양은냄비였다. 정리=강주화 기자
[역경의 열매] 장욱조 (2) 부친 “예수 믿느니 내 주먹 믿겠다” 전도 비웃어
입력 2015-10-06 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