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6) 영아소동과 헤론

입력 2015-10-06 00:08
1888년 서울에 유포되어 읽혔던 반기독교 서적 ‘벽사기실’의 삽화들. “돼지를 활로 쏘아 죽이고 양의 목을 베어라” “양귀를 구타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라”고 씌어 있다. 옥성득 교수 제공

제중원 원장으로서 헤론이 겪은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1888년 6월 발생한 영아소동(Baby Riot)이었다. 외국인들이 아이들을 사서 잡아먹는다는 유언비어가 돌면서 반외국인 감정이 고조되고 유혈 폭동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발생한 첫 반기독교운동이었다.

영아소동의 헛소문과 그 배후

제물포 개항 후 아이들이 자주 실종되자 처음에는 일본인 상인들이 매매한다고 의심했으나, 곧 ‘외국인들이 어린아이들을 잡아다가 삶아먹고 쪄 먹는다는 헛소문’으로 발전했다. 언더우드의 고아원에서는 “소년들을 살지게 먹인 후 미국에 노예로 판다” “제중원 수술실에서 아이들 심장으로 성찬식 묘약을 제조하고, 눈알로 사진기 렌즈를 만든다” “성찬식 때 쓸 피를 위해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살해 위협을 받았다. 아이들은 창남창녀나 노예로 파는 일본과 청나라 상인 때문에 실종되고 있었다.

급기야 6월 폭동이 일어났다. 아이를 선교사에게 팔았다고 말한 정신 이상자가 돌에 맞아 즉사했고, 이틀 만에 10명의 한국인이 살해되었다. 외국인 집에서 일하던 하인들은 두려워 달아났다. 진고개 주변의 일본인 소매상들이 아이들을 매매했다고 믿은 군중은 일본공사관을 공격하려 했다. 경비가 강화되자 군중은 정동으로 가서 외국 공사관들과 선교사 주택을 노렸다. 외국 공사들은 한국 정부에 엄중 항의하고, 제물포에 있던 해병대와 해군을 신속하게 이동시켜 공사관들을 경비했다. 포도청이 4대문에 방을 붙이고 소문을 퍼트리는 자를 체포하자 소요는 진정되었다.

프랑스 공사 플랑시는 서울 영아소동과 중국 톈진 대학살 사태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1870년 6월 톈진에서는 프랑스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아이들이 병에 걸려 많이 죽자, 선교사들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퍼졌고 폭동이 발생해 성당과 영사관이 불타고 약 40명의 중국인 신자와 20명의 선교사, 영사가 살해되었다.

플랑시는 청국 주차관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가 병을 핑계로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심했으며, 첩보를 분석하여 일본인 유괴설이나 외국인의 ‘영아포식’ 소문의 진원지가 위안스카이라고 결론 내렸다. 세력을 회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그는 소요가 발생하면 조선 정부가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며, 그때 이토 히로부미와의 조약에는 위배되지만, 서울에 청군을 진주시킬 생각이었다.

헤론의 분석과 대처

1888년 1월 6일 고종은 의사 헤론의 수고를 가상히 여겨 종2품 가선대부의 품계를 내렸다. 1888년 봄 헤론은 제중원 진료, 외국인 왕진, 왕실 진료, 정동 사택 내방 환자들을 돌보면서 정세와 민심의 추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한편 과중한 업무로 편지를 쓸 시간도 없었다. 영아소동이 발생하자 딘스모어 공사는 서울 거주 미국인들에게 제물포로 피신을 준비하라고 명했다. 헤론은 해산을 앞둔 아내를 걱정했다. 다행히 사태가 진정된 7월 14일 첫 딸이 태어났다. 헤론은 일이 많아 신발이 다 닳았고, 3주일 동안 “새벽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잠시도 편히 쉴 틈이 없었다”고 썼다.

7월 23일 엘린우드 총무에게 보낸 편지에서 헤론은 영아소동과 같은 사태가 자주 발생할 것이며 상당 기간 외국인은 신변이 위험하므로 직접 전도나 지방 진출보다, 서울에서 의료와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영혼을 구원할 희망이 없다면 단 하루도 한국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변호했다. 다음 편지에서도 영아소동 당시 딘스모어와 스크랜턴은 어린이를 한 번에 네 명씩 먹는다는 소문이 났으며, 또 다른 소요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0월 5일자 편지에서 헤론은 영아소동을 재론했다. 그는 “조용히 사역할 수 있지만 주목을 끌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서울에 선교사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공사들은 모든 일을 선교사 탓으로 돌렸다.

“예외 없이 선교사들은 물론 데니 판사와 딘스모어 씨와 묄렌도르프 씨를 포함한 모든 외국인들이 아이들을 사서 먹는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인에 대해 소문이 났지만 훨씬 이전에 외국인에 대한 소문이 났습니다. 권위 있는 자의 말에 의하면, 한 중국인이 쓴 소책자로 중국에서는 금서인 ‘벽사기실(쌨慟뷩品?862)’이 서울에서 오랫동안 유통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보지 못했고 가진 자도 보지 못했으나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중팔구 귀하께서는 이 책을 아시겠지만, 17∼18년 전 톈진대학살을 야기했다고 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책이 한국인들을 선동했고 조선 정부가 취한 첫 조치로 소요가 확대되었습니다.”

‘벽사기실’은 중국에서 반외국인운동을 선동한 대표적인 반기독교 서적이었다. 기득권을 상실한 지방 관리가 천주교의 발음이 돼지가 꿀꿀거리는 소리와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해 예수를 하늘에서 온 돼지(天猪)로, 선교사는 중국인의 눈을 빼어 약을 만들고 여자를 겁탈하는 서양귀신(洋鬼)으로, 그들을 따르는 신자는 서양 양(西羊)으로 묘사한 삽화들을 넣어, 선교사와 교인을 죽이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울 것을 선동했다. 헤론은 이 책이 영아소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확신했다. 결국 소동의 배후에는 청국 공사 원세개와 친청 보수 양반들이 외국인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려는 음모가 있었고, 폭동을 선동하기 위해 ‘벽사기실’을 사용해 유언비어를 퍼뜨렸던 것이다.

유언비어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외국인이 아이를 잡아 먹는다는 소문은 조작된 것이지만 민중은 이를 믿었다. 과거엔 아이를 잡아먹는 것이 호랑이요, 더 무서운 것이 세금 걷는 탐관오리였으나, 이제 주범은 양귀(洋鬼)로 바뀌었다. 한국의 ‘미래를 잡아먹는’ 외국 침략자에 대한 민중의 두려움이 소문을 믿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 유포자는 자본주의가 만든 인간 말종들이었다. 돈을 위해 어린이를 인신매매한 청·일 상인들, 힘을 위해 선교사들을 식인종으로 만든 외교관들이었다. 청·일의 식민지 경쟁이 만든 첫 폭동인 영아소동은 외국인과 선교사를 희생양으로 만들었고 그들에게 민심의 불만을 돌리게 했다. 동학도들도 ‘척왜척양’을 내세우며 외국인을 몰아내려 했으나, 일본의 야욕을 깨닫고 ‘척왜’로 바뀌었다. 헤론은 소용돌이치는 정세 속에서 병원과 학교를 통한 신중한 선교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옥성득 교수 (美 UC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