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0년 동안 예수를 모르고 살던 ‘딴따라’였다. 조용필의 ‘상처’, 최진희의 ‘꼬마인형’, 태진아의 ‘두 여인’, 박정식의 ‘천년바위’, 방주연의 ‘기다리게 해놓고’, 유미리의 ‘젊음의노트’…. 내가 작곡한 노래만 1000곡이 넘는다. 1980년대 직접 부른 ‘고목나무’ ‘낙엽 위에 바이올린’ ‘왜몰랐을까’라는 노래로 ‘오빠 부대’를 이끌기도 했지만 후속곡들의 음반 실패로 큰 빚을 지게 됐다.
아내가 지인들에게 빚을 얻으러 다니다 전도를 받았다. 그 아내의 손에 이끌려 1986년 3월 31일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됐다. 예수님과는 무관할 줄 알았던 나의 교만이 십자가 사랑으로 녹아내렸다. 탕자처럼 살았던 삶을 끝내고 내 삶의 주권, 소유권, 생존권을 예수님께 맡기기로 했다. 주님 주신 은혜의 감격으로 ‘생명나무’라는 찬송을 작곡했다.
대중가수로서 부른 고목나무와 복음가수로서 부른 생명나무라는 두 곡은 내 인생의 기원전(B.C)과 기원후(A.D)를 상징한다. 아마도 두 나무의 이야기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내 입술의 간증이 될 것이다. 지난 삶을 돌아보니 내가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인도해 주셨다. 나에게 특별히 음악적인 재능을 주셔서 수많은 노래로 하나님이 나를 훈련 시켜 주셨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나 같은 죄인에게 ‘할 수 있다 하신이는’과 같은 곡을 쓰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지난날 나처럼 고목나무와 같은 사람들에게 찬송이 울려 퍼져 그들에게도 생명의 잎새가 돋아나길 기도한다.
나는 해방 이태 뒤인 1947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현 목포)에서 장효식과 정연순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49년 이름을 올렸다. 그땐 홍역으로 숨지는 아이가 많았다. 본래 우리 형제는 9남매였는데 내 위로 내 아래로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목포경찰서 경찰관이었다. 작은 할아버지는 면장이었다. 어린 시절 세 발 자전거를 타고 놀 정도로 우리 집은 부유했다. 땅도 제법 있었다. 1950년 6·25, 북한의 남침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비극이다. 아버지가 경찰관이었던 우리 집안의 불행도 참담했다. 증조할아버지부터 증손자까지 4대 15명이 함께 살다가 어머니와 우리 3남매 형님, 누나, 나만 목숨을 부지했다. 아버지는 부산의 낙동강 전투에 참여하느라 부산에 계셨고 목숨을 지키셨다. 나머지 식구들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북한군이 목포를 접수했을 무렵이다. 북한 편이 된 사람들, 소위 치안대는 정부 관리이거나 국군을 도운 이들의 집에 쳐들어갔다. “씨를 말려야 한다”며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남자는 모조리 잡아갔다. 몽둥이로 때리고 창으로 찔렀다. 우리 집에도 그들이 닥쳤다. 나는 광에 있는 항아리에 들어갔다. 검고 커다란 항아리에 머리를 내밀었다. 문살에 모기장이 쳐져 있었다. 그 모기장으로 바깥이 보였다. 빨간 완장을 찬 청년 두세 사람이 어렴풋이 보였다. 장대를 들고 있었다. “애 새끼 어디 갔어?” 가슴이 쿵쾅거렸다. 다섯 살 무렵인데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정리=강주화 기자
◇약력=전남 목포 출생, 지구레코드 전속 작곡가, ‘장욱조와 고인돌’ 대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목회대학원 석사, 현 한국복음성가협회 회장, 한소망교회 선교목사와 세계로교회 협동목사
[역경의 열매] 장욱조 (1) ‘고목나무’가 ‘생명나무’로… 내 노래처럼 바뀐 인생
입력 2015-10-05 0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