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시리즈 Ⅱ] 서독, 돈·현물 지원-동독, 정치범 석방·이산상봉 ‘화답’

입력 2015-10-03 02:37
볼프강 쇼이블레 서독 내무장관(앞줄 왼쪽)과 귄터 크라우제 동독 국무장관(앞줄 오른쪽)이 1990년 8월 31일 동베를린황태자궁에서 ‘독일통일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로타르 드 메지에르 동독 총리(앞줄 가운데)를 비롯한 양독 주요 인사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독일의 ‘프라이카우프’는 1962년부터 시작됐다.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분단된 지 20년이 채 안 된 시기였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자유(Freiheit)’를 ‘구입(Kauf)’하는 방식이었다. 주체는 서독의 교회였다. 1962년 서독 신교회는 트럭 3대분의 칼리비료와 옥수수, 석탄 등을 동독 측에 전달하고 정치범 명목으로 구금돼 있던 동독지역 교회 관계자들을 데려왔다.

이듬해가 되자 아예 서독 정부가 나섰다. 서독 정부는 프라이카우프를 단순하고 단편적인 정치범 석방 또는 이산가족 교류로만 보지 않았다. 분단체제 하에서도 동독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할 수 있으며, 인권 개선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한 것이다. 정책 시작부터 ‘길고 멀리’ 본 셈이다.

반면 동독 정부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적 영향은 최소화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최대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양독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서독은 동독의 지극히 ‘은밀주의적’ 방식을 존중해 프라이카우프 결과물을 통독 때까지 공개하지 않았다. 우파 기독교민주연합(CDU)이 집권할 때도, 좌파 사회민주당(SPD)이 집권할 때도 이 원칙은 결코 부정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는 ‘정부 대 정부’ 방식이었지만 서독 교회와 동독 민간단체들을 프라이카우프의 주체로 내세웠다. 프라이카우프로 합의된 물자 지원 실무는 서독 슈투트가르트의 독일교회협의회(EKD) 산하 사회구호복지 기구인 디아코니가 담당했다.

맨 먼저 서독 교회가 동독 자치단체를 지원하면서 긴밀한 유대가 형성됐다. 동독 정부도 서독 교회와 동독 자치단체를 오가는 돈·물품을 계속 묵인했다. 디아코니는 석방될 정치범의 수와 물품이 확정되면 서독 내 5개 회사에 위탁해 동독이 원하는 물자를 국제시장 가격으로 구매해 동독에 공급했다. 동독은 물자를 받으면 아무런 제한조건 없이 이를 국제시장에 되팔아 외화를 확보했다.

그 결과 1963∼89년 26년간 서독은 이를 통해 정치범 3만3755명을 데려오고, 25만명의 이산가족을 상봉시켰다. 사용된 금액은 17억3000만 달러(약 1조8400억원)였다. 프라이카우프를 시작할 당시 동독에는 약 1만2000명의 정치범이 투옥돼 있었지만 통일 직전에는 그 수가 2000∼2500명에 불과했다. 1991년 냉전시대 양강이었던 미·소(소련·구 러시아) 간 힘의 균형 붕괴로 갑작스레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지만 실질적으로 통독을 가져온 원인은 프라이카우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