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많은 한계를 지니고 살아간다. 특히 시력의 한계는 더욱 극명하다. 너무 작아도 보지 못하고, 너무 커도 보지 못한다. 그런데 인간의 시력으로는 볼 수 없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반드시 봐야만 하는 것들이 정말 많다. 사물을 정확히 보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인간의 시력 너머의 것들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이럴 때 우리는 많은 난관에 부닥치게 된다. 그러니 꼭 봐야할 것은 정확히 볼 수 있는 ‘보는 지혜’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예를 들면 사람 내면의 진정성을 정확히 못 보면 오해가 생긴다. 오해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이어진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도 그렇다. 그 마음의 진정성을 볼 수 없는 자녀는 부모와 갈등을 빚는다. 마찬가지로 자녀의 진정한 꿈과 소망을 보지 못한 부모도 자녀와의 관계가 좋을 수 없다.
우리는 정치인이 국민의 작은 소망을 정확히 보지 못해 공동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사례를 숱하게 보았다. 이 땅의 종교지도자들이 지탄을 받고 종교가 더 이상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종교지도자들이 종교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소망을 정확히 보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학교 공동체가 모두의 근심거리가 된 아픔 역시 기성세대의 ‘보는 지혜’가 부족해 빚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무엇이든지 정확히 볼 수 있는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도 보는 지혜의 필요성을 강조하신 바 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0장 15절에서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와 일한 품꾼과 조금 늦게 일하러 온 품꾼, 마지막 한 시간만 일한 품꾼 모두에게 같은 임금이 지불되자, 불만을 토로한 이들에게 했던 말씀이다. 이 말씀은 그날 일한 모두에게 같은 임금을 지불한 주인의 선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석게 주인을 바라본 이들을 꾸짖는 내용이다. 단순한 인간적 논리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이해한다면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한 인간의 어리석음이 불만과 불평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또 마태복음 11장 7∼9절에서 자신을 찾아와 질문하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봐야할 것을 정확히 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내용이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그 내면의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보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소중한 것일수록 그 소중함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름다운 것 역시 언제나 쉽게 보이는 게 아니다. ‘보는 지혜’의 소중함을 기억하면서 살 만한 세상,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최범선 목사(용두동교회)
[시온의 소리-최범선] 보는 지혜
입력 2015-10-02 0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