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한국적 思惟’를 우리의 시선으로 정리하다

입력 2015-10-02 02:55
고대부터 현대까지 유학은 물론 불교, 도교, 동학, 마르크스주의 철학, 기독교 사상 등을 두루 아우르면서 한국 철학사 1300년을 일관된 시각으로 정리해 낸 전호근 경희대 철학과 교수. 메멘토 제공
한국 철학사 1300년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800페이지가 넘는다. 삼국시대 원효, 의상에서 시작해 현대 함석헌, 장일순까지 한국 지성사의 거물 35명을 시대 순으로 소개한다. 조선시대 인물이 15명으로 가장 많다.

저자는 전호근(52) 경희대 철학과 교수다. 조선 성리학 전공자로 동아시아 고전들을 소재로 여러 책을 썼고 대중 상대 고전 강좌를 20여년 운영해 왔다. 전 교수는 서문에서 그동안 한국 철학은 존재 자체를 증명하는 것조차 힘겨웠다고 회고한다. 1980년대 후반 마르크시즘 바람 속에서 국내에선 한국 철학을 “돌아볼 가치도 없는 그야말로 쓰잘 데 없는 물건으로 치부”했으며, 영미권 학자들 대부분은 “동아시아의 사유를 사상이나 철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넘을 수 없을 듯이 보이는 이 같은 편견에도 나는 한국 철학이 아직 이 땅에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 까닭은 이제는 한국 철학을 이야기할 때라고, 이제는 우리의 삶을 우리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고 누군가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한국 철학사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한국에도 철학의 전통이 있고 한국적 사유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그간 한국 철학사를 정리하려는 시도가 없진 않았지만 전체를 조망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워낙 방대한데다 축적된 연구가 부족한 탓도 있을 것이다. 단독 저자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아우르면서 한국 철학사의 전모를 일관된 시각으로 정리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출판사에서 “명실상부한 의미에서 최초의 한국 철학사”라고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책의 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한국 철학사 1300년을 조망한다는 것은 유학은 물론 불교, 도교, 동학, 마르크스주 철학, 기독교 사상 등을 두루 거쳐나가는 과정인데 저자는 이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현대적인 화법으로 풀어낸다.

“당나라 무종 때 강제로 환속시킨 승려의 수가 26만 명이라고 합니다. 환속 승려의 수와 실제 승려의 수를 합하면 대략 백성의 15퍼센트가 승려였다고 하죠. 당나라 문인 한유(韓愈)가 이를 격렬하게 비판했어요. 노동자, 농민 같은 생산자의 처지에서 보면 지식인이나 승려 계층은 밥벌이도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면 폐단이 생기겠죠.”

이런 식이다. 철학이라고, 한문으로 가득한 동양 고전이라고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저자는 욕심을 하나 더 냈다. 한국 철학의 연대기를 충실하면서도 쉽게 서술하는 일을 넘어서 당대 동아시아 철학과의 관계를 규명하려고 했고, 한국적 사유의 전통이 현재 우리 삶의 문법 속에 어떤 모습으로 들어와 있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종합적이면서도 독창적이고, 또 고유하면서도 현대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저자의 저술 방향은 35명의 철학자 선발에서 잘 드러난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그간 한국 철학사에서 금기시돼 왔던 일제 강점기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신남철과 박철우를 ‘변혁의 철학을 꿈꾼 1세대 철학자들’로 복권시킨 것이다. 또 주로 종교사상가로 거론돼 왔던 유영모와 함석헌을 서구 사상을 전통의 언어로 사유한 현대 철학자로 평가했고, 민주화운동가이자 생명운동가인 장일순을 처음으로 철학자로 조명했다.

이밖에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살피면서 불교 중심에서 벗어나 도교 전통과 유학자들의 활동을 적극 기술해 중세 한국 철학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든가, 고려 말에 등장한 성리학자들에 주목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책은 시대 순을 따르며 철학자들을 이어붙이는 식으로 구성됐지만 내용적으로는 관계와 흐름을 충실히 반영해 평면적이지 않다. 저자는 주요 주제를 논의할 때 동서양 철학계와 비교하면서 한국적 사유가 어떤 수준에 있었고 어떤 특징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18세기 조선의 백과전서파와 유럽 계몽사상가를 비교하고, 북학의 선구자인 홍대용의 우주관에 당시 유럽 사회의 우주론을 견준다. 또 19세기 조선의 지식계를 살피면서 청나라 지식계와의 차이를 설명하고, 일제 강점기 한국 철학계의 분위기를 당시 일본 철학계의 흐름과 함께 들여다본다.

원효와 의상, 균여와 의천, 정몽주와 정도전, 이황과 조식과 이이, 박지원과 정약용 등 철학사의 라이벌들이 펼친 사유의 대결을 비교해 보거나 돈점논쟁(돈오돈수와 돈오점수 논쟁), 태극논쟁(무극태극 논쟁), 사칠논쟁(사단칠정 논쟁), 인심도심 논쟁 등 주요한 철학 논쟁들을 구경할 수도 있다.

저자는 한국 철학사를 돌아보면서 ‘양극단을 통합하고 상대를 포용하는 관점’을 한국적 사유의 특징으로 추출해 낸다. 원효, 의상, 균여, 지눌 같은 불교철학자는 물론이고 현대의 박종홍 장일순 등 현대 철학자들에서도 이런 특징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