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고은아] 상고법원 도입하려면

입력 2015-10-01 02:20

어느 전직 법관의 대법원 재판연구관 시절 에피소드 하나. 그림 하나가 국가보안법상 이적 표현물에 해당하는지가 문제돼 1심과 2심에서 모두 무죄가 선고됐으나, 검사는 상고한 사건에서 그 그림을 법원 식당에 걸어두고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했다고 한다. 며칠 살펴봐도 아무도 그림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림에 대한 감상을 슬쩍 물어도 그저 목가적 농촌생활을 그린 것 아니냐고 답했다. 그래서 ‘1심과 2심 법원 판단이 옳구나’ 하고 결론을 내리려던 차였는데, 대법관들이 식당에 와서 그림을 보는 순간 상황이 반전됐다. “어, 저 그림 이적 표현물이잖아.”

이어 대법원은 대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유죄의 취지로 환송하였다. 그리고 5년 후 유엔인권이사회는 대법원의 유죄판결이 인권규약 위반이라고 결론지었다. 신학철 화백의 모내기 그림 사건이다.

대법관의 통찰력은 아무래도 보편적인 일반인 시각과 차이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안에 따라서는 국민들의 보편적 정서나 상식보다 엄격하고 통찰력 있는 전문가의 판단이 요구될 수도 있고, 특히 형평성과 소수자의 보호를 위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특정 집단의 획일화된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전문가의 통찰력으로 오인돼서는 안 될 것이다. 그 경우 법원은 분쟁과 갈등의 조정자 또는 해결자가 아니라 갈등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최근 대법원은 상고법원의 도입을 이례적이라고 할 정도로 적극 추진하고 있다. 홍보도 매우 열심이다. 대법원 홈페이지에 홍보배너를 만들고, 포털 검색광고를 하고, 현수막을 내걸고, 홍보 자전거 대장정을 하는가 하면 지하철역에도 홍보영상을 게재하고 있다. 법원답지 않은 낯선 풍경이다.

그러나 공들인 데 비하면 반응은 신통치 않다. 광고에서는 “어서 빨리 상고법원이 생겼으면 좋겠어요”라고 외치고 있으나 공허하게 들릴 정도다.

왜 그럴까. 문제는 대법원 자신에게 있다고 하겠다. 상고법원이 생기면 일반 사건은 상고법원이 담당하고, 사회적 파장이 크거나 판례를 변경해야 하는 사건은 대법원에서 맡아 심리해 판결하게 된다. 대법원의 정책법원 기능을 강화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런데 최근 대법원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래서 도대체 무엇이 좋아진다는 것인지, 변화에 대한 기대를 일찌감치 접게 한다.

국민들이 대법원에 바라는 것은 대법관들이 판결할 때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을 반영해 사회적 쟁점과 갈등이 되는 문제들을 놓고 활발한 토론을 거쳐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대법원에 대해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이 다양성이 실종된 ‘일사불란한 대법원’이다. 현재 많은 국민들의 눈에 비친 대법원의 모습은 동년배의, 비슷한 배경을 가진 소수 대법관들이 그들의 유사한 가치관대로 판결할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분쟁과 갈등의 믿을 만한 조정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 최근 3년간 대법원 전원합의체판결 52건 중 26건이 전원일치 판결이라고 한다. 그중에는 전 국정원장 사건, 통상임금 사건, 키코 사건 등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들이 포함돼 있다. 전임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 주요 사건마다 다양한 소수의견들이 제시됐던 것과도 비교된다.

대법원이 진정으로 국민들을 설득하고자 한다면 최고의 홍보는 판결로 보여주는 것이다. 다양한 배경의 대법관들이 소수자를 배려하고 다양한 가치관을 반영해 생기있는 토론을 거쳐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비로소 “어서 빨리 상고법원이 생겼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이 힘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다.

고은아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