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디자이너로 일한 지 올해로 40년. 그동안 한복뿐 아니라 현대 패션과 수많은 디자인 제품을 만들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옷은 ‘바람의 옷’이 아닐까 한다. 오늘날 수많은 한복 디자이너들이 한복 치마를 저고리 없이 서양 드레스처럼 입는 이 바람의 옷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 옷은 1993년 프랑스 파리 컬렉션에서 내가 처음 발표했던 작품이다. 당시 이 옷의 자유로운 실루엣과 고혹적인 빛깔에 반한 ‘르몽드’ 기자 로랑스 베나임이 기사에 ‘바람의 옷’이라는 별칭을 쓰면서 이 옷은 더욱 유명해졌다.
나는 12년간 파리 컬렉션에 참가해 한복이 아닌 ‘현대적’ 패션으로 세계 여러 나라 출신의 디자이너들과 경쟁했다. 파리 패션계에 진출한다고 했을 때 나를 비판했던 이들은 프랑스 현지인이 아니라 한국 패션계의 여러 사람들이었다. ‘한복 만들던 사람이, 그것도 나이 많은 여자가 디자인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외국에 나가느냐’, ‘만들던 한복이나 제대로 만들지 현대 패션으로 파리에 나간다는 게 말이 되느냐’ 등의 쑥덕거림이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파리에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목표가 뚜렷했기 때문에 흔들릴 여유가 없었다. 실제로 12년 동안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 무대에서 (이후 오트 퀴튀르에서 2년 동안) 1년에 2회씩 패션쇼를 열면서, 현지에서 언제나 열렬한 찬사를 들었다. 나에게는 창조력이 솟아나는 비밀의 샘물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전통’이다. 한복에서 배운 크고 작은 지혜, 한복 옷감이 가진 색의 아름다움, 한국 건축과 공예와 예술들이 품고 있는 미학, 이런 모든 것들이 디자인의 창고이며 교과서다.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믿음도 있었다. 40년 동안 만들어온 한복이지만 아직도 날마다 한복과 전통의 아름다움을 접하면서 가슴이 뛴다. 그 가치를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나라에 알리고 싶은 것이 하나의 꿈이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서 한복 패션쇼를 열었고, 파리에 진출했으며, 뉴욕에는 한복박물관까지 열었다. 하지만 최근 한국 내에서 한복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세태의 변화 때문이겠으나, 한복은 결혼할 때 한번 입는 옷으로 취급당하는 것 같다. 한복은 사람과 딱 맞아떨어져 어우러질 때 더 아름답게 빛나고, 입은 사람까지 훤하게 살려주는데 그 깊이와 가치가 잘 전달되고 있지 않다.
오는 10월 18일까지 경주에서는 ‘유라시아 문화특급’이라는 주제로 ‘실크로드 경주 2015’ 행사가 열린다. 이 행사를 통해 한국의 전통문화 콘텐츠가 자국 안에 갇히지 않고 세계라는 큰 맥락에서 이해되고, 나아가 그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바람의 옷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전통문화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문화의 본질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해외에서 이해될 수 있는 형식으로 표현했던 것도 효과가 있었다. 파리와 뉴욕 패션 현장에서 10여년간 현지인들과 경쟁을 펼치며 선진국의 패션산업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각국 정부는 콘텐츠산업을 위해 어떤 지원을 하는지 생생하게 목격했다. 한국의 전통문화 콘텐츠에는 해외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잠재력이 분명 충분하다. 이 잠재력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창작자와 관련 업계, 정부가 유기적으로 협업을 펼쳐 올바른 방향을 찾아가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
[기고-이영희] 한국전통의 美, ‘바람의 옷’
입력 2015-09-26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