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과 정부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허술했고, 묻지마 살인의 유력 용의자에겐 운이 따랐다. 23일 입국·수감된 ‘이태원 살인사건’ 피고인 아서 존 패터슨(36·미국)이 16년간 자유를 누린 배경에는 정부의 형집행정지, 출국정지 미연장, 인도요청 지연이 있었다. 법무부는 지금에 와서 ‘극적 사법공조’라고 자평했지만 범죄 피해자인 유족은 18년간 고통을 겪어 왔다.
◇살인 용의자, 합법적 ‘탈옥’=특별사면을 받았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패터슨은 건국 50주년 광복절특사 대상자가 아니었다. 그는 수감 태도가 좋다는 이유로 형집행정지를 받아 1998년 8월 15일 천안소년교도소를 나왔다. 2011년 11월 권재진 당시 법무부 장관은 “사면에 곁들인 인도주의적 견지였다”며 “외국인 수형자 77명을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한 일괄적인 형집행정지가 당시 있었는데 거기에 패터슨이 포함된 것으로 파악한다”고 밝혔다.
패터슨이 석방된 시기는 우리 사법부가 아직 ‘이태원 살인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 판단하지 못하던 때였다. 당시 살인 혐의자였던 한국계 미국인 에드워드 리(36)는 여전히 패터슨이 흉기를 휘둘렀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형집행정지 4개월 전인 98년 4월 24일 대법원이 “리가 조씨를 살해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둘 중 나머지인 패터슨의 살인 혐의가 짙어지는 상황에서 턱없이 관대한 형집행정지가 이뤄진 것이다.
98년 9월 30일 대법원의 파기환송 사건을 받아든 서울고법은 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조씨의 유족은 패터슨을 처벌해 달라는 고소장을 서울지검에 제출했다. 검찰은 패터슨을 수사하는 동시에 리에 대해서도 재차 대법원의 판단을 물었다. 하지만 두 용의자는 한순간 검찰의 손을 빠져나갔다. 패터슨은 99년 8월 24일 김포공항에서 출국했고, 대법원은 1주일여 뒤인 9월 3일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정부는 늘 바빴다=“출국금지 기간이 연장되지 않은 이유는 당시 기간 만료일이 99년 8월 23일인데 주임검사가 8월 26일자 인사이동을 앞두고 각종 업무의 폭주로 기간만료 사실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2000년 10월 23일 국정감사에서 김각영 당시 서울지검장은 패터슨의 출국 경위를 이같이 설명했다. 한마디로 ‘깜빡했다’는 얘기였다.
검찰은 패터슨의 출국 이틀 뒤인 8월 26일에야 출국정지 기간 연장을 신청했다. 이미 미국으로 나간 사실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수사검사는 참여계장이 유흥주점 업주로부터 뇌물을 받아 구속돼 충격을 받았고, 특수부 인사이동을 앞두고 인수인계에 바빴던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 법무부는 2009년 10월 15일 미 법무부로부터 패터슨의 정보를 전달받았다. 캘리포니아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패터슨이 이태원 살인사건 용의자 패터슨과 동일인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법무부는 이때에도 검찰의 범죄인 인도요청이 없었다는 이유로 기민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 검찰은 한 법제사법위원이 일의 진척을 문의한 다음날 법무부에 공문을 보내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다음 달 2일 첫 재판…변호인은 연기 신청=망연자실한 조씨 유족은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마저 가시밭길이었다. 2002년 6월 25일 1심은 “패터슨에 대한 수사는 진행 중”이라며 유족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았다. 2003년 5월 15일 2심은 다섯 줄 판결문에 1심과 같은 이유를 담아 항소를 기각했다.
2005년 9월 9일 대법원에 가서야 유족은 정신적 고통을 인정받았고, 조씨의 부모는 1500만원씩을 국가로부터 배상받게 됐다. 유족은 패터슨과 리를 상대로 민사소송도 제기해 2억여원의 손해배상금 지급 판결을 받아둔 상태다. 하지만 아무도 이들의 소재를 몰라 배상이 집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서울중앙지검은 2011년 12월 패터슨을 재수사해 살인죄로 기소한 박철완 부장검사를 재판에 투입하기로 했다. 패터슨은 변호인 3명을 선임했다. 한국 경찰에 패터슨의 신병을 넘겼던 미군 범죄수사대(CID)의 협조를 구하고, 리를 증인으로 신청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심규홍)는 다음 달 2일을 첫 공판준비기일로 잡았지만 변호인들은 연기 신청을 했다. 재판부는 캐비닛 속 장기 미제사건의 기록을 틈틈이 검토해 왔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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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9-25 02:26